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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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과 만난 사람들] 사촌동생 박성직
좋은 일 생각하고 말하면 그 날은 좋은 날

진 빚이 한량이 없구나!

푸르다! 소나무
풀과 나무 가운데 으뜸이라
눈서리 이겨내고
비오고 이슬 내려도 웃음 짓지 않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결 같아라…….

법정 스님을 떠올리면 늘 사명 스님 청송사靑松辭가 절로 입 안에 감돌았는데, 경인년庚寅年이 저무는 12월, 법정 스님 사촌동생 수광壽光 박성직(71)선생을 만나면서 청송사가 떠올랐다. 스님이 겨울 산 위에 우뚝 선 소나무라면 수광 선생은 달빛을 거르는 소나무처럼 은근하다.

“스님이 살아 계실 때는 웬만한 분들은 내가 사촌 간 인줄도 몰랐을 거예요. 길상사 법회 때 오가는 길목에서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뵙고, 말씀도 길에 서서 몇 마디 나누곤 했으니까요.” 법정 스님을 가까이 했던 이들은 스님이 길상사 나들이하는 날이면 일찍부터 와서 기다리다가 스님이 오시면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곤 했지만, 수광 선생은 멀찌막이 서서 조용히 법문만 듣고 갔다. “잘 아시잖아요. 인척들한테는 엄하고 소원하셨어요. 어떨 때는 좀 섭섭하기도 하지마는, 어르신 처지를 알기 때문에. 애써 거리를 뒀어요.”
늘 그렇게 먼발치를 지켰던 수광 선생은 스물일곱 살에 결혼을 하고부터 쭉 법정 스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지금도 제사를 모시고 있죠. 마침 12월 25일 날이 제사예요. 어느새 24주기네요. 스님이 네 살 때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저는 태어나기도 전이죠. 할머니는 그런 손주가 몹시 안쓰러워서 각별히 사랑하셨지요. 스님하고 저는 여덟 살 차이인데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어요. 한 집에서. 한 형제나 진배없었죠. 큰어머니는 한 동네에서 집 한 채 얻어가지고 따로 사셨어요. 그런데 저는 어려서 두세 살 적부터 큰어머니 댁에 가서 자고 놀고 그랬어요.” 할머니를 형에게 빼앗긴 보상 심리에서였을까? 수광 선생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보다 큰어머니를 유난히 더 따랐다.
“우리 큰어머니가 진도 분이세요. 육자배기를 아주 걸쭉하게 잘하셨어요. 큰어머니가 마루턱에 걸터앉아 육자배기를 한가락 구성지게 뽑아 넘기시면, 동네 어른들이 넋을 놓고 앉아서 듣곤 했어요. 그러면 저는 노래를 못 부르게 쫓아다니면서 마구 떼를 썼어요. 나랑 놀아달라고.”

모시고 살았던 이십 여 년 세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는데 법정 스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 “아주 쾌활하시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으세요. 여담인데요. 시골에서는 농사지으려면 사람들을 사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어머니는 그런 걸 잘 못해요. 그런데 큰어머니가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잘 와요. 뭐랄까? 뒤로 보리쌀도 한 됫박 더 준다든지…, 온화하고 붙임성이 좋으세요. 친구들을 좋아하시고 시골 분답지 않게 유머도 넘치시고 인덕이 있으셨어요. 대인 관계는 스님이 어머니를 빼어 닮지 않았나 싶어요.”
수십여 년 모시고 살다보면 이모저모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텐데? “큰어머니 성격이 워낙 온화하셔서 모시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남하고 다투는 일이 없으세요. 저희 어머니는 역정을 내기도 하고 남 얘기도 가끔 하고 그러셨는데 큰어머니는 남한테 싫은 소리를 못하세요. 그런 성격이시니 아무래도 우리네보다 큰어머니가 좀 불편하셨을 테지요. 그래서 그런지 가슴앓이. 큰어머니는 스님 출가 전부터 속앓이를 하셨어요. 스님 네 살 때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사셨잖아요. 더구나 해방 전후 모든 게 다 궁핍하고 모자라서 힘들 때였으니….”

- 진 빚이 한량이 없구나
수광 선생이 출가한 스님을 처음 찾아뵈었을 때가 해인사 시절이었다. “한 번 다녀가라고 그러셨어요. 휴가 갔다가 귀대하면서 들렸습니다. 해인사에서 하룻저녁 자고 왔어요. 그때는 스님도 출가하신 지 얼마 되지 않고 나도 군대 가있기 때문에 잘 보지 못했어요. 스님은 책 얘기를 많이 했어요. 제가 스님 책을 그때까지도 보관하고 있었어요. 처음엔 책을 우편으로 부쳐드리고 그랬지요.”
스님 모습을 보면서 출가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을까?
“그런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어요. 나까지 출가해 버리면… 하하. 출가하신 뒤 편지에도 쓰셨습니다. 네가 기둥이니까 우리 집을 잘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우리 클 때만해도 장남이 동생들 뒷바라지하고 다 그랬어요. 스님이 영특했기 때문에 어른들이 기대를 많이 했는데….”

……지금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무표정한 직업인이 되는 것이다. 해서 나는 초연한 修道僧이기보다는, 自然人으로서 진리를 모색하는 哲學徒가 되고 싶을 뿐이다. 불교 가운데서도 종교측면은 나를 질식케 하지만, 哲學 영역만은 나를 언제까지 젊게 하고 있지 ―.

물론 社會人에겐 살아가는데 직업이 필요할 수밖에. 하지만 인간 본래 良心이라든가 의지를 잃어버리고까지 거기에 얽매일 건 없을 줄 안다. 어쩌면 이 말은 빵의 존엄성을 모르는 철부지 말일지도 모른다만. 항상 하는 말이지만, 우린 生存만으론 살고 있는 보람이 없어. 줄기찬 생활이, 창조적인 생활이 있어야 해……. 아 듀 1960.10.21 山僧 法頂 합장

성직에게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電報를 오늘 오후에야 받아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데, 요즘 내 건강과 주위 여러 가지 형편이 나를 不自由하게 만들고 있다.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은혜로운 분은 작은 아버지시다. 나를 敎育시켜 눈을 띄워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할머님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오늘은 法堂에 들어가서 많이 울었다. 이일저일 생각하니 내가 진 빚이 한량이 없구나. 不孝하기 그지없고 ―. ……出家 外人이라드니, 가는 길이 서로 달라 어쩌지 못함이 안타깝고 죄스러울 뿐이다. 어머님을 잘 위로해드려라.
나는 오늘부터 아버지 명복을 佛前에 빌기로 作心했다. 四十九日 동안 佛敎儀式에 따라 기도를 드리는 일이다. 가신 분 은혜에 報答하는 내 도리요 정성인 것이다…….
七十年 十一月 二十七日 밤 法 頂 合掌


불교는 언제부터? “저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 교회도 좀 다녔어요. 스님 편지에도 그런 내용이 있어요. ‘너는 교회를 좋아했지 않았나?’ 제대로 불교를 한 건 큰어머니 돌아가실 무렵이니까 25~26년 정도? 우리 집사람은 해남 대흥사 바로 아래서 살아서 옛날부터 절에 다녔어요. 우리출판사 아십니까? 발행인이 비구니 스님인데 집 사람과 사촌간이에요. 저하고 법정 스님도 사촌간이니 우리 내외가 다 불연佛緣이 깊네요.”
법정 스님도 학창시절 절에 가셨을 때 마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불연이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닌 듯싶다. “86년도 여름에 스님이 초청해 주셔서 불일암가서 이틀밤을 묵으면서 정식으로 계도 받았어요. 제 불명이 수광壽光입니다. 목숨 壽자 빛 光자. 우리 집사람은 공덕림功德林. 그전까지는 가짜 불자였어요.” ‘공덕림’ 공덕이 숲을 이뤘다는 뜻이니 시집와서 내내 스님 어머니를 모시고 산 보살심을 기리는, 뜻이 담긴 법명이다.
“계첩도 붓글씨로 손수 쓰셔가지고 저희 내외에게 따로따로 하나씩 낙관까지 찍어 주셨어요. 인연이죠. 인연. 스님이 돌아가신 건 섭섭하지만, 우리 집안에 다녀가신 일은 너무나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수광 선생 내외와 자녀들은 모두 불자지만, 형제들은 제각각이다. 여동생은 천주교. 남동생은 기독교. 막내는 불교. 간디 말씀처럼 히말라야 정상은 하나지만 정상을 오르는 길은 저마다 다르다.

- 굶어죽어라!
수광 선생은 딱 한 번 법정 스님에게 손을 벌린 적이 있다. 대전에서 윤활유 대리점을 인수하고 난 뒤 운영자금이 모자라 쩔쩔매다가, 법정 스님은 책도 쓰고 신문이나 잡지에 글도 많이 쓰시니 도와줄 힘이 있지 않겠느냐는 둘레 사람들 말에 용기를 내서 어렵사리 스님께 편지를 썼다.
“아마 72년쯤인가? 그 무렵 막다른 골목이다 싶었어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라며 도움을 청했어요. 나중에 생각하니까 참 부질없는 말씀을 드렸구나 싶었어요. 그때 스님이 보내 주신 편지가 있어요. 들어줬으면 좋겠지만 스님이 무슨 돈이 있겠느냐.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나중에 스님이 이런 글을 쓰셨어요. 레오 버스카글리아라는 사람이 어머니가 말리는데도 고집을 세우고 미국서 파리로 건너갔어요. 그곳서 끼니를 굶다 못해 어머니에게 전보를 치죠. <굶어 죽어가요. 아들>. 돌아온 답이 <굶어라. 엄마>이었어요. 냉정한 어머니말씀에 정신 차렸다는 이야기인데. 도둑놈 제발 저리다는 격으로 ‘아, 이 말씀 내게 하는 말씀이구나.’ 싶었지요. 곁을 조금 주면 또 기대고 싶었을 거예요. 그 도움 없이도 이제껏 잘 살아왔잖아요?” 그랬기에 다른 분들처럼 스님을 스승으로 기억할 수 있어서 참 좋다는 수광 선생. 그 스님에 그 동생이다 싶다. 그래도 서운하지 않았을까? “서운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스님과 우리는 가는 길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에. 말 그대로 출가외인이라고 여기고, 모든 분들 스승이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스님께 누를 끼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좋은 일을 생각하고 말하면 그 날은 좋은 날이다.
불쾌한 일을 생각하고 말하면 그 날은 나쁜 날이다.
좋은 날과 나쁜 날은 오로지 내 생각과 말에 달린 것.”
수광 선생이 집에 걸어놓고 늘 되새기는 법정 스님 말씀이다. 그렇게 늘 좋은 일만 떠올리며 살려고 애쓴다.

아이들과 함께 법정 스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던 수광 선생. 신림동 집은 제법 컸다. 24년 전 큰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다녀간 사람들 사이에 “법정 스님이 해준 집이다.”는 얘기가 돌았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았는데 ‘야, 유명세를 이렇게 치루는구나’ 싶었어요. 하하. 누구한테 하소연을 하겠어요. 버선목이라고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그런 얘기가 나올 법도 하다.’ 그러고 말았죠.”

- 스님 덕이다
법정 스님이 고맙다는 인사는 하셨을까? “온 식구를 불러다가 불일암에서 재워주시고 계를 주셨으니 그게 표현이고 큰 인사지. 이틀 밤이나 재워주셨잖아요. 한 분이 출가해서 도를 깨치면 몇 대 친인척까지 그 빛이 미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희 형제들 모두 우애 있게 잘 살고 있어요. 저희 집 애들도 큰 걱정 끼치지 않고 잘 컸고. 제사 때 모이면 입을 모아 그럽니다. ‘밥술이라도 걱정 없이 먹고 사는 게 다 스님 덕이다.’고.”

“스님이 입적하시기 전에 병원에 계실 때 두어 번 갔어요. 그때는 말씀은 잘못하셨어요. 그저 스님 손을 잡고 ‘성직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면 손을 꼭 쥐어주셨어요. ‘공덕림도 같이 왔습니다.’하고 집사람이 손을 잡으니까, 손에 힘을 꼬옥 주시고는 흔드셨어요. 집사람은 그때 스님 손을 처음 잡았죠.”


부처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이른다면? “뭐 우리 같은 문외한들이 불교에 대해서… 허허. 대승견지에서 바라봐야 하는데 우리 같은 소인들이야 뭐 압니까? 경전에 쓰인 대로, 또 스님이 풀이해서 책에 많이 써 주신대로 ‘착하게’ 말이지. 그렇게 사는 게 불자佛者된 도리가 아닐까요?” 수광 선생이 법정 스님 말씀 가운데 가장 가슴 깊이 뿌리내린 이야기는 모기이야기다. “시어머니 모기가 집을 나서면서 저녁밥을 지어놓을까 보냐고 묻는 며느리한테 ‘모진 놈 만나면 맞아죽을 거고. 좋은 사람 만나면 얻어먹을 거니까.’ 이래도 저래도 저녁밥 차리지 말라는 얘기인데…. 덕은 베풀지 못할망정 산목숨 빼앗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글=법정 스님 자취를 더듬는 변택주,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
2011-03-15 오후 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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