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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과 만난 사람들]前 방송인 이계진
법정 국수 한사리 간질간질 생각나

지금부터 꼭 천 년 앞선 1011년. 고려는 초조대장경을 파기 시작한다. 흔히 고려대장경을 부처님 힘을 빌려 거란이나 몽골 침략을 막으려는 마음에서 팠다고 깎아내리지만, 대장경을 만들어 적을 막으려고만 했다면 굳이 인쇄경판으로 만들 까닭이 없었다. 대장경을 찍은 참 뜻은 부처님 열반 뒤 부처님 말씀을 모은 일처럼 온 나라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일군, 겨레 얼이 담긴 큰 역사다.
지난 가을. 법정 스님과 인연이야기를 들려주십사 부탁하려고 화계산(지도에 없는 관봉 선생이 지은 산 이름) 자락에 자리한 시민모임 맑고향기롭게 이사 관봉 이계진 선생(65) 댁을 찾았다.

비가 개인 끝 시리도록 맑은 하늘과 맥고자를 쓴 선생 모습이 어우러져 선선하다. 관봉 선생이 법정 스님을 처음 뵌 건 20여 년 전 여름, 온 식구가 송광사 수련회에 갔을 때였다. 그 뒤 경복궁 앞 법련사에서 스님을 다시 뵈었을 때 스님은 “<샘터>에 쓴 글을 봤는데 글이 참 맑더군요”하고 덕담을 건넸다. 그리고 1992년 불일암에서 선생 부부는 법정 스님에게 계를 받았다. 향적(香積)과 삼매화(三昧華). 그날 스님은 내외에게 점심공양으로 국수를 비벼주셨다. 일러 ‘법정 국수’다.

스님은 국수를 손수 삶아 우물가로 가서 찬물에 헹군 다음 맨 국수를 한 사리씩 감아 맛을 보라고 건네주셨다. 스님은 하늘을 쳐다보며 하얀 국수 한 사리를 간질간질 목으로 넘기셨고, 우리도 스님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며 하얀 국수 한 사리씩을 간질간질 목으로 넘겼다.

관봉 선생 수필집 <남자도 가끔은 옛사랑이 그립다>에 나오는 글이다. 나그네는 집 바깥뜰에 원시모습 그대로인 화덕에서 선생이 손수 삶아 진간장과 참기름, 김 부스러기를 버무린, 고소하고 맛깔난 법정 국수를 맛보는 영예를 얻었다. 지난 15년. 사람들이 화계산 자락 관봉 선생 댁에 들어서면서 늘 묻는 말이 있었다. “와! 몇 평이나 되요? 땅값이 얼마나 되죠?” 그동안 그걸 묻지 않은 사람이 법정 스님까지 네 분이 있었는데, 셈에 둔할뿐더러 미욱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 나그네가 묻지 않은 탓에 ‘다섯 번째 바보’란 이름을 얻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그리고 두어 달 남짓 지난 12월 초 다시 만난 자리.
“스님을 뵙기 전부터 ‘많이 가지더라도 늘 갖지 않은 모습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또 좀 모자라고 못난 구석이 있어도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고 내가 욕심이 없지는 않아요. 그러다 스님을 뵙고는 ‘내 생각이 그르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오늘도 전철을 타고 걸어왔는데, 좋은 구두가 있지만 오래된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게 참 편안해요.”
돈이 있지만 티 안내고 차가 있지만 걸으면서 행복해 하는 관봉 선생. 밟을 리(履), 지날 력(歷)을 쓰는 ‘이력’이란 말에 걸맞은 발자취다.
17대와 18대 30분씩 한 시간, 국회의원 선서할 때를 빼고는 배지를 달아본 적이 없다는 말씀에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 15년, 궁궐 지은 얘기를 적바림하면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넘치지 않는다’고 한 대목이 떠올랐다.

서울서 살다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다는 일은 선뜻 뛰어들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가 중풍이 드셔서 아파트에선 살기 힘드셨어요. 낙향할 기회가 아닌가 싶었는데 그 무렵 스님께서 <월든>을 읽으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부인이 시골생활을 꺼렸다.
“여자가 결정을 하지 않으면 못갑니다. 시골생활 3W가 있어요. 먼저 ‘와이프wipe’가 허락해야 하고, 둘째 ‘워크work’, 워크는 두 가지로 해석해요. 하나는 노동력, 그 밖에 따로 할 일이 있어야 한다며 무일푼이면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머지는 ‘워터water’ 물이 있어야 하는데 가장 으뜸이 와이프죠. 건강이 좋지 않아 시골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지 몰라 망설이던 집사람이 선뜻 결정 내린 데는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그리고 장두석 씨가 쓴 자연치유 능력에 대한 책 <민족생활의학>이 있었어요. 그 책들을 읽고 나더니 ‘한 번 주어진 인생인데.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며 마음을 냈어요.”

그 때 관봉 선생이 프리랜서가 되고 두어 해쯤 지나 그야말로 잘 나갈 때였다. 내려가 있는 사이, 동료나 라이벌들은 프로그램 수주하러 다니고, 광고 찍으러 다닐 생각을 하니까 미치겠더란다. 그래도 “지금도 난 이만큼 부자인데, 가자! 내게 주어질 일이 있으면 산골이 아니라 숨어있어도 찾아올 거다. 이런 배짱으로 갔어요.”
하지만 한편으론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정리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갈등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법정 스님은 산속에서 밥그릇 하나 가지고 살고 계신데”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서울 살았으면 얼마를 더 벌었을 거라는 생각, 그건 가상이잖아요. 이루어지지 않은, 생각 속 손해는 손해가 아니에요. 서울 사는 시간을 줄여서 큰 병이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보면 시골가길 얼마나 잘했어요?”
그런 모습을 법정 스님은 장하게 여겼다. 집을 짓고 한 해 남짓한 가을 녘에 스님이 오셨다. 당신이 권한 책을 읽고 실천하다니 신기하다는 생각도 하셨을 스님. 참 좋다고 잘했다고 하면서도 적잖이 걱정도 되셨는지 “살아보니까 일을 너무 하면 안 되겠더라고…. 골병이 드니 쉬엄쉬엄하고, 나무는 이렇게 가꾸고…”하면서 산골생활 노하우를 하나하나 찬찬히 일러주셨다. 그러기를 15년. 자연인 이계진 삶은 얼마 전에 펴낸 책 <주말농부 이계진의 산촌일기>에서 만날 수 있다.


따뜻한 눈길, 그리고 끝없는 관심
14대 때 처음 정치를 권유 받은 관봉 선생. 당치 않은 소리 말라며 단호히 뿌리쳤다. 하지만 15대 땐 물리치기가 너무 힘들었다.
“안가기도 너무 힘들었어요. 오죽하면 방송국, 신문사마다 찾아다니면서 ‘난 국회 안갑니다. 기사 내지 말아주세요.’ 그러고 다녔어요. 그렇게 말하곤 집에 오면 갈등이 되요. 이러다 기회를 놓치는 거 아닌가? 하고.” 고민 끝에 법정 스님을 찾아뵙고 여쭈었다. 스님은 “처사가요? 거기 가시면 차맛을 잊어버릴 거요.”하고 간단없이 말씀했다. “그날 밤부터 우리 내외는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었어요. 법력 높은 스님 말씀 한 마디가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그 다음 16대 때 스님은 “기도해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하세요”라고 했다.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는 말씀. 선생 귀에는 그 말이 “하지 마세요”로 들렸다.
“집에 와서 또 마음이 편해지는 거야. 안 나갔어요. 그 산골에, 날 데리러 이름 대면 다 알만한 톱 정치인들이 와선 밤 12시가 되도록 대답 듣겠다고 어르다가 ‘그럼 나오는 걸로 알겠습니다’하고 돌아가고 나면, 이튿날 내용 증명을 보냈어요. ‘그렇게 답한 적이 없다’고.”

매화향이 그윽하게 감도는 2003년 이른 봄 불일암. 법정 스님과 마주 앉은 관봉 선생. 조심스레 입을 뗐다. “스님. 제가 아주 유치한 사랑소설을 하나 썼는데요. 스님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하고 여쭈니, 스님은 “처사가요?”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선한 눈매를 가지고 기다리고….”하시면서 종이와 붓을 꺼내 “사랑은 따뜻한 눈길, 그리고 끝없는 관심!”이라고 써 주셨다.
군시절부터 오래도록 꿈꾸며 벼리던 사랑소설 <솔베이지의 노래>. 소리 때문에 험한 꼴을 본 중년 방송인 김시향과 불치병에 걸린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펼치는 말간 순애보. 여주인공 이름이 한효리. “효리는 본디 ‘소리’에요. 평생 아나운서를 했던 내 애인. 사운드sound죠. 소리라는 이름이 바로 와 닿을 것 같지 않아서 효리라고 했어요. 말 배우는 어린애들한테 ‘효’ 해봐 하면 ‘소!’ 그러거든요.” 주인공 이름을 소리라고 지을 만큼 소리는 선생에게 목숨과 같았다.

17대 때, 그토록 손사래 치던 국회의원 출마 결정을 내리고 스님을 찾아뵈었다. 스님은 “나이가 들면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씀은 ‘소리 듣는 귀가 열렸다.’는 짧지만 준엄한 인가(認可).
선거전이 한창일 때 선거사무실에서 급히 찾아 달려가 보니. “법정 스님이 와 계셨어요. 스님을 뵙자마자 막 눈물이 쏟아지는데…, 법대로 순리대로 하는 게 나름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한참 있다 꺼낸 말이 ‘아니, 스님이 여길 왜 오셨어요?’였어요. 그 말씀을 두어 번 했어요”라고 말하는 관봉 선생. 금세 눈시울이 물러지며 코끝이 붉어온다. “아버지가 오신 것 같아서…. 그때 스님이 ‘그래, 얼마나 힘드냐’고 하셨어요. 스님이 다녀가셨다는 얘기를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어요. 그 때 사진이 몇 장 있어요. 선거 끝나고 국회의원 할 때 그 사진을 보면서 ‘바르게 해야지. 바르게 해야지.’하고 되새겼어요. 18대 때도 잠깐 오셨어요. 음식점에서 점심 대접하고는 어서 가시라고 그랬어요. 여길 왜 오셨냐고. 나 때문에 어른 스님이 정치판에 모습을 보여? 어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아름다운 패배
요즘 눈길을 끈 드라마 ‘대물’을 보면서 선생 모습을 떠올렸다고 했더니. “깜짝 놀랐어요. 내가 캠프에서 했던 대사가 그대로 나와서. 처음 정치를 할 때 우리 집사람이 통장을 갖다가 회계자에게 주면서 ‘이 돈이 전부에요. 더는 돈도 없고, 쓸 수도 없어요.’ 2억 얼마 법정 선거비용. 그 다음 국회위원 선거 도지사 선거 때도 캠프에서는 공약을 잘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 때마다 나는 ‘지키지 못할 공약은 못합니다. 지킬 공약만 합시다’라고 말했어요. 오늘 한 말이 잘못된 줄 알게 되면 그 다음 방송 시간에 반드시 고치고 나갔던 사람이 어떻게 거짓말을 해요? 이번 선거 때 돈 써야 한다고 둘레에서 소리 높일 때도 ‘비겁한 승리보다 아름다운 패배를 택하겠다.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그 말이 그대로 나오더라고요.”
드라마 속 주인공은 도지사가 됐지만, 현실 속 관봉 선생은 낙마했다. “거짓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죠. 천심, 민심이 뭡니까? 여러 사람 생각이 모인 건데, 천심이 올바른 선택을 하는 날이 오게 하려면 나 같은 희생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요즘 어디 가서 축사나 인사할 때 그래요. ‘선거에 져서 죄송하지만 부끄럽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국민과 시민단체 그리고 언론이 날마다 옳다고 떠든 대로 했을 뿐이다.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지나쳤던 부분이 있다면 고칠 수는 있지만 탈법을 해가면서 자세를 바꾸고 싶지는 않다’고 얘기했어요.” 그는 앞일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다시 선거전을 치루더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잘라 말한다.
순수가 통하고 원칙이 통하는 세상을 한 번 만들어 보겠다고 시작한 정치. 세비 말고는 17, 18대 두 번 국회의원 선거를 치루면서 후원금을 받지 않았다. 18대 들어와서는 돈이 없어서 의정 보고를 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후원금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한테 이계진은 돈을 받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어, 도지사 선거 때도 후원금이 적게 들어와 많은 빚을 진 관봉 선생. 집에 스님 사진을 걸어놓고 드나들 때마다 “스님,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고 인사드린다.


30년도 훌쩍 넘은 아주 오래 전. 나그네가 몸담았던 패션계에서 관봉 선생에게 패션쇼 사회를 부탁하고 사례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정해진 대로 주십시오”이다. “나는 출연료를 흥정해 본 적이 없어요. 그건 제 무덤을 파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자존심 상해요. 내 몸값을 내가 정한다는 게. 돈을 두 곱 더 받는다고 삶이 두 곱으로 행복해지겠어요?”

정재, 청재
맑고 향기롭게 처음 모습 스케치를 부탁했다. “스님이 처음 하신 얘기는 단순해요. ‘중이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어?’ 이게 출발점이에요.” 맑고 향기롭게 활동은 누구라도 뜻을 같이 하는 이라면 종교를 따지지 않고, 요란스럽지 않게 제 스스로, 여기저기 손 벌리지 않고 제 주머니 털어 나누고, 키우려 들지 말고 자연히 늘어나는 대로 하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그 가운데 종교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 몹시 마음에 들었어요. 그때 돌아가신 아동문학가 정채봉 선생도 계셨는데 처음엔 불자인줄 알았는데 천주교인이더군요. 스님이 하시고 또 길상사 둘레에서 하니까 아무래도 불교가 중심이 되는데, 문을 더 열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선생은 사업을 자꾸 늘려나가기보다는 하던 일 제대로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일을 벌리다보면 돈이 많이 들어가고 돈이 필요하면 여기저기 손을 벌리거나, 수익 사업에 손을 대게 되고 그러다보면 부작용이 생기게 되니까. “정재淨財, 청재淸財를 하자는 거지요.” 선생은 맑고 향기롭게 운동이 처음 생각대로 단출하고 담백하게 이어가기 바란다.

법정 스님이 입적에 들기 이틀 전, 선생은 남미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스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렸다. 여행길 눈에 쏙 들어 사온 한 뼘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인형을 스님께 드렸더니 스님 낯빛이 연꽃잎 벙글 듯이 환해지셨다.

돌아오는 길. 성덕대왕 신종에 적바림된 말씀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부처님 말씀을 글로 옮기면 불경이고, 부처님 모습을 만들면 불상이고, 부처님 목소리를 만들면 종소리니라.”
글=법정 스님 자취를 더듬는 변택주,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 einew@hanmail.net
2011-03-02 오후 6: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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