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은 한번은 거쳐야 할 일이었다. 자신의 삶을 살지 않은 결과다. 법정 스님은 “자신의 삶을 살라”고 늘 강조했다. 길상사를 말하면 ‘맑고향기롭게 근본도량, 가난한 절’이 아니라 ‘법정 스님이 시주 받은 사찰’이 떠오른다. 맑고향기롭게를 말하면 ‘참 보살들의 모습’이 아니라 ‘15년 전 유행한 연꽃 스티커’가 떠오른다.
길상사 주지 덕현 스님이 주지 소임 2년, 맑고향기롭게 이사직 10개월 만에 침묵을 깨고 수행자의 길을 떠났다. 법정 스님 입적 1년만이다. 침묵의 도량은 무참히 깨졌다. 대중이 만들어 놓은 실패작품이자 기회다.
덕현 스님은 2월 7일 맑고향기롭게 소식지를 통해 ‘이사장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어 21일 길상사 홈페이지에 ‘그림자를 지우며’라는 글을 올렸다. 그동안의 고뇌와 내부의 문제를 소상히 짐작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법정 스님 열반 1주기를 앞두고 드러난 길상사와 맑고향기롭게 내부 갈등은 가십거리가 됐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일련의 일을 두고 다양한 해석을 쏟아냈다. 언론을 비롯한 네티즌 들은 길상사 前 주지 덕조 스님과 덕현 스님의 주지를 둘러싼 욕망으로 분석했다. 과거 법정 스님과 덕조 스님의 갈등을 들먹이고, 법정 스님의 유언도 다시 펼쳐졌다. 배후조종자가 있다는 둥 조작된 유언이라는 둥 말빚은 또 다른 말빚을 낳았다. 오로지 세속의 잣대를 들이댄 시비와 분별심은 쓸모없는 의혹만 키웠다.
덕조 스님은 17일 해제 때 본지와 인터뷰에서 “여기(불일암)에 있으니까 서울 가기 싫어졌다. 서울에서의 삶은 고갈되는 삶이고 수행하는 삶은 감사하는 삶”이라고 했고 법정 스님의 약속을 이어가기로 했다. 덕현 스님이 떠난 후 길상사 주지에는 법정 스님의 5번째 상좌 덕운 스님이 문도회의를 통해 내정되면서 혼란은 일시 중단된 모습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만 좇는 거지가 되려는가
덕현 스님 평소 “맑고향기롭게 구심력 흔들리고 불안”
덕현 스님이 소식지와 홈페이지에 글을 게재한 것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주위 사람들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17일 해제 때는 “이사회를 한 번 할 때마다 봉변을 당하는 기분이었다”며 20여 년 함께 봉사해온 감사와 직원의 언행과 자신의 고뇌를 폭로했다.
덕현 스님은 이사취임 직후인 6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도 길상사 주지 소임과 맑고향기롭게 이사직이 쉽지 않다고 했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까지 길상사와 맑고향기롭게를 많이 걱정하셨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 길상사나 맑고향기롭게의 구심력 흔들리고 불안한 구석이 있다”며 “맑고향기롭게가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부터 은사 스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사실상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고 설명했다.
며칠 후 길상사에서 삼소회 음악회가 있던 날 신문을 들고 맑고향기롭게 사무실을 찾았다. 맑고향기롭게에서 10여 년간 활동했다는 한 활동가는 스님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스님이 정말 맑고향기롭게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냐? 그것을 그대로 쓰는 기자가 어디 있느냐”며 강하게 비난했다. 기자는 물론 덕현 스님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 내포돼 있었다.
사람들은 前 주지 덕조 스님이 2000년부터 이뤄놓은 길상사에 2009년 3월 새로 취임한 덕현 스님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당시 이사직을 맡았던 관계자에 따르면 덕현 스님에게 대들거나 원망하고, 길상사를 떠나는 신도들이 있었다. 젊은 스님이 뭘 알고 하겠냐며 무시도 했다. 그 중에는 길상사나 맑고향기롭게에서 주요직을 맡은 이도 있었다.
덕현 스님은 떠나면서 “법정 스님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어수선한 분위기, 적지 않은 반대, 곱지 않은 시선에 시달려 왔다”며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사람들의 정제되지 않은 욕심과 야망, 시기심, 그리고 무리의 중심에 있는 사람의 고충과 충심을 헤아리지 않고 그 결정과 처신을 무분별하게 비판하고 매도하는 말들, 그 뒤에 숨은 아상(我相)들이었다”고 말했다. 외로운 분투였다. 스님은 소식지에서 종종 “자신이 없다” “맑고향기롭게 이사장 선임을 전후해 나는 길상사 주지가 됐을 때 못지않게 몹시 마음이 무겁고 스스로에 대해 깊은 연민과 비애감을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심경은 슬프고 우울하다”는 등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맑고향기롭게 윤청광 이사는 “맑고향기롭게에 내부적인 소란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스님의 글 그대로 보면 될 것”이라며 “NGO로서 본 역할에 충실하고 법정 스님의 뜻과 정신을 흔들림 없이 이어가겠다”고 태연한 입장 표명만 했다. 덕현 스님과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거론된 관계자들은 억울함을 법정 스님 기일까지 묵빈대처 하기로 했다. 이사회는 3월 2일 긴급 이사회 직후 본법인의 공식적인 해명할 계획이다.
스님을 따르는 신도들도 많았지만 덕현 스님은 맑고향기롭게 이사회에서 만큼은 ‘왕따’였다. 이사회를 진행하면서 덕현 스님은 스스로 ‘공격당했다’ 표현했다. 스님은 17일 해제법문에서 “이사회를 한 번 할 때마다 봉변을 당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구심력을 갖기 위해 법정 스님을 맑고향기롭게의 영구 회주로 추대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사회나 대의원회는 독선적으로 일을 추진한다며 제동을 걸었다. 종교를 초월한 시민 모임이기 때문에 불교적인 색채를 가지면 정체성을 흐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사회에서는 덕현 스님의 사직서를 두고도 설왕설래 했었다. 이 과정에서 덕현 스님은 내부에서 정치적으로 자신을 물러나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며 걸망을 지고 떠났다.
덕현 스님의 버리고 떠나기는 출가자의 참된 모습이기도 하다. 출가 본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한 생각에 의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길로 돌아가는 수행가풍이다.
하지만 세속의 시각에서 덕현 스님의 발언과 행동이 아쉬움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법정 스님 1주기가 끝나고 해도 될 일이었다. 동안거 해제 법문의 내용으로 부적절 하다고 볼 수 도 있다. 이사회 관계자의 “한 개인의 실명을 거론해 인민재판을 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다” “법정 스님은 물론 불교계의 이미지를 심하게 훼손한 행위다” 는 반응도 일리가 있다.
법정 스님의 후광이 무섭게 느껴진다. 스님이 작은 말빚까지도 갚고 가려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길상사와 맑고향기롭게는 법정 스님의 것이 아니다. 물론 신도들의 것도 아니고 이사들의 것도 법정 스님의 상좌들의 것도 아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길상사와 맑고향기롭게는 이욕과 실리에 사라졌다. 이미 ‘내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문제다.
법정 스님의 상좌라는 이유로 엉겹결에 유명세를 타 번거로운 삶을 사는 출가수행자들의 고초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불일암에 주석하는 덕조 스님은 “사람들이 오는 것은 나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스님을 보러 오는 것이고, 스님을 모시는 것이기에 불일암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덕현 스님도 마찬가지였다.“스승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분부를 거역할 수 없어 그동안 여기 있었다”고 했다.
불법을 배우러 절에 가기보다 불상에 절을 하기 위해 가는 중생처럼 사람들은 법정 스님의 상좌에게 법정 스님의 향기를 느끼려 한 것은 아닌지. 아니 그들에게 법정 스님과 같은 삶을 강요한 것은 아니었는지. 법정 스님 열반한지 1주년이 지났다. 이제는 자기다운 모습으로 본분에 충실해야할 때다. 진정 ‘나’ 다운 삶 없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만 좇는 거지가 되는 일은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