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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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열반 1주기 특집 덕조 스님 인터뷰
법정 스님은 말ㆍ글ㆍ행동 일치하는 참 선승

“헉...헉...헉....(쿵덕쿵덕쿵덕).”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숲길에서 호흡과 조급한 심장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스님과 약속시간보다 40여 분이 늦었으니 할 말은 없는 처지지만 전화를 해보고, 문자를 찍어본다. 겨우 전화 연결만 될 뿐 상대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하늘이 노랗다 못해 하얗다.
“천천히 오세요!!! 불일암은 핸폰이 안됩니다!!!”
순천 송광사 불일암 덕조 스님의 문자 한 통에 기자 둘이 살아났다. 안심법문이 따로 없었다. ‘관세음보살. 헉.... 헉. 헉. 헉.’ 법정 스님의 맏상좌다. 시간관념 철저하기로 소문난 그 스승에 그 제자일 것이라. 걸음을 재촉해본다.

법정 스님 열반 후 두 차례 안거가 지났다. 어느 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2월 17일 동안거 해제날 불일암에서 덕조 스님을 만났다. 법정 스님은 ‘상좌들 보아라’는 유언에 맏상좌에게 당부의 말을 특별히 해 놓았다.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

송광사 문수전에서 동안거를 마친 덕조 스님은 살짝 야위었다. 약속시간을 훌쩍 넘었지만 스님은 “먼 길 오시느라 애쓰셨습니다. 한양이 가까운 거리가 아니에요”라며 따뜻하게 객을 맞이했다.

불일암은 봄기운이 만연했다. 법정 스님이 1975년부터 1992년까지 17년간 길들여 놓은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암자 곳곳의 잔디가 사라졌다. 불일암으로 올라가는 운치 좋았던 길은 넓어지고 파이는 등 피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있었다.
“은사 스님이 가시고 나서 정말 번다해졌죠. 사람들은 불일암이 스님들의 수행공간이고 삶의 공간이라는 생각보다는 마치 유적지를 방문하는 듯해요. 관광 코스 아닌 관광 코스가 된 거죠. 어떤 이는 ‘어 사람이 사네?’라고 하기도 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스님의 체취를 느끼려고 오는 손님들을 문전박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이곳에서 사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아요. 내 삶을 살라고 한다면 저도 이곳에 살 마음은 없지만, 스님을 시봉하는 거니까 이곳에 사는 거죠.”
덕조 스님은 ‘스님이 주고 간 큰 숙제’라며 오히려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작은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법정 스님이 손수 만든 빠삐용 의자 위에 방명록을 쓰도록 하고 책갈피와 사탕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15만 장의 책갈피가 나갔다고 하니, 하루 평균 400여 명이 불일암을 찾은 꼴이다. 내 집에 매일 400여 명이 온다고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법정 스님의 체취가 담긴 곳곳을 더듬어 볼 테니 그 소음과 번다함은 어떠할까.

빠삐용 의자에서 3m 떨어진 곳에는 법정 스님이 아끼던 후박나무가 있었다. 스님의 유골이 뿌려진 후박나무 아래는 사람들이 무심히 밟고 지나갈까 염려해 덕조 스님이 손수 대나무로 둘레를 쳐 놨다. 스님을 향한 애뜻한 마음이었다.
불일암 내부는 ‘텅 빈’ 공간이었다. ‘정갈’이라는 표현은 무언가 소유하고 있는 자의 표현이었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수행공간에는 상좌들의 출입도 일절 금했었다. 청소부터 모든 것을 스님은 손수 했다. 오로지 수행을 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덕조 스님은 아직도 스님이 살아계신 것 같아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공양간으로 난 뒷문을 사용했다.


“지금도 스님을 생각하면 긴장이 돼요.”
2평 남짓한 공간의 다실. 군불을 때고 있지만 싸늘했다. 덕조 스님은 두런두런 대화를 이끌었다.
법정 스님에게 우편물을 전해주던 행자 시절을 떠올리는 스님의 눈에 긴장감이 돌았다. 당시 송광사 행자들은 3개월 씩 돌아가며 불일암 우편배달 심부름을 했다. 깐깐한 법정 스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은 영광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어렵고 긴장된 시간이기도 했다. 시간을 목숨처럼 여기는 스님은 당신도 시간을 어기지 않았지만 상대방도 시간을 어기는 것을 용서치 않았다. 홀로 수행정진을 함에 있어 철저한 시간 관리가 없으면 수행은 이뤄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잘못하면 스님의 생활 질서가 엉망이 되거든요. 스님 앞에만 서면 긴장감이 들었죠. 심부름 외에도 청소하고 시봉을 하는데, 스님은 딱 한번만 시범을 보이시고 그대로 따라 하라고 하셨죠. 어른에게 두 번 묻는다는 것은 없거든요. 해내야 하는 것이기에 그것 자체가 엄청난 긴장이었어요.”
법정 스님은 “반찬을 많이 하지 마라. 정신만 혼란해진다”며 공양도 최소한으로 했다. 아침에는 누룽지나 떡국, 점심은 밥, 저녁에는 국수를 주로 드셨다. 덕조 스님에게도 공양하는 법도 딱 한번 알려주시고 그대로 따라 하라고 했다. 떡국에는 땅콩버터를 살짝 넣고, 국수는 간장과 참기름 깨소금만 살짝 넣어서 구수하고 담백하게 만드는 것을 시범보이면 그대로 따라해야 했다.

법정 스님은 세납 52세가 돼 덕조 스님을 첫 상좌로 뒀다. 덕조 스님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법정 스님의 상좌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지만 스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시절인연이 된 것이겠죠. 감히 스님의 상좌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하지만 송광사 행자 생활을 하면서 각오했죠. 안되면 재수라고 하겠다는 생각으로 받아주실 때까지 하겠다고요.”
법정 스님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해야 할 정도로 가장 무서운 스님이었다. 그 이면은 스님에 대한 공경심과 존경심이 가득했다. 법정 스님은 말과 글과 행동이 일치하는 참 선승이었다. 행자 시절이었다. 새벽 3시 동지 팥죽을 주전자에 담아 큰 절에서 불일암까지 부리나케 들고 뛰어 올라왔다. 스님은 정진 중이었다. 또 신도들과 차를 마시다가도 예불 시간이 되면 스님은 어김없이 예불을 올렸고, 병상에 있을 때도 스님은 예불을 올렸다. 행자시절부터 지켜본 법정 스님은 예불, 취침, 공양 시간을 철저하게 지켰다. 스님은 강원도 오두막에서도 홀로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고 청규에 따라 결제와 해제를 했다.

덕조 스님은 “공경심과 예경심으로 스님을 모셔온 것이 지금까지 여법한 수행자의 삶을 사는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했다. 법정 스님은 ‘스승은 제자로 하여금 새로운 분신이 되도록 해야 한다. 제자를 통해서 스승은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제자는 스승 인격을 믿고 따르면서도 스승의 모방자가 돼서는 안 된다. 스승의 경지를 딛고 일어서 한걸음 앞서야 비로소 그 스승의 은혜를 보답할 수 있다’며 사제관을 밝혔다.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스님의 뜻에 따라 법정 스님의 일곱 상좌인 덕조(德祖), 덕인(德仁), 덕문(德門), 덕현(德賢), 덕운(德耘), 덕진(德眞), 덕일(德日) 스님은 제방 수행자로 어디 가서든 모범을 보인다. 덕조 스님은 “법정 스님 상좌라는 것이 수행자에게 좋은 배경이기도 하지만 일거수일투족 법정 스님이라는 꼬리표가 큰 부담이기도 하다”고 고백했다. 스님은 “ ‘출가 장부는 구속받지 않고 당당하며, 자기답게 살아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덕조 스님은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다운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까?

“출가 수행자라면 당당해야죠. 할 말은 하고 사는 거죠. 잘한 것은 잘했다고 인정해주고 잘못된 것에는 잘못됐다고 지적할 수 있는 확실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수행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덕조 스님은 ‘종교는 봉사’라는 생각으로 포교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12년 간 서울 길상사 주지를 맡으면서 쌓은 노하우도 많다. 법정 스님이 ‘친절’을 강조했듯 스님은 신도들에게 작은 감동을 주고 싶어한다. 절을 찾은 신도들에게 소참법문을 해주고, 관심을 갖는 것이다. 덕조 스님은 법정 스님이 “덕조 글 잘 쓰네. 너도 글 한번 써보라”고 인정할 만큼 글솜씨도 있고, 제1회 템플스테이 사진공모전 금상을 받을 만큼 사진도 잘 찍는다. 하지만 스님은 상황에 따라 포교를 위한 방편으로 하는 “수도(首都)승도 좋지만 수행승이 돼야 한다”며 수행자에 무게를 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뜻을 밝혔다.

12년간 도시 생활을 했던 스님은 “서울 생활은 고갈되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자기 생활은 저녁예불 이후 잠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없고 빡빡하게 하루가 돌아가는 도시 생활 속에서 충전하는 삶이 간절했었다. 덕조 스님은 송광사와 불일암에서의 수행자의 생활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 지금의 삶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물었다.
“단 하루라도 아니 잠시라도 좋아요.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기위해서는 떠나봐야 해요.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돌이켜 봐야죠.”

강원도에 주석하면서도 법정 스님은 해제 때가 되면 불일암을 찾았다. 상좌들과 차를 마시며 상좌들이 안거기간 중 어떻게 살았는지, 선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고 점검했다. 옛날 선방 이야기도 해주고 청규에 따른 수행자로서의 자세도 말씀했다. 스님은 언제 은사가 가장 그리울까?
“지금… 아… 가슴 아프네요.”
흘리듯 던진 질문에 스님의 눈가에는 촉촉해졌다.
“살아계시면 뵐 수 있는데 안 계시니... 안 계시면 볼 수가 없어요. 그게 가슴 아파요. 모르겠어요. 문득 보고 싶은데 못 보니까 가슴 아프죠. 그게 모르겠어요. 무슨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보고 싶을 때는…. 보고 싶은 마음이 밀려오면 가슴이 아프죠. 더구나 1주기가 다가오니.”

애별리고(愛別離苦)가 스님을 스쳐가는 듯 했다. 법정 스님은 대중과 있을 때는 억새풀처럼 무섭고 날카로웠지만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외국에 갔다 올 때면 꼭 선물을 챙겼고, 잠시 광주라도 나갈 일이 있으면 상좌를 위한 필기구를 꼭 사왔다. 당신에게 온 선물도 고이 챙겨뒀다 상좌에게 선물을 했다.

덕조 스님은 상좌로서 법정 스님의 뜻을 오롯이 이어가기를 서원했다.
“1주년이라고 이런저런 것을 하는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셨을까요? 이것도 우리 생각이거든요. 사람들의 생각 이면에는 순수하게 그분을 위한 것이 아닌 욕심이 있거든요. 순수함과 진정성이 없으면 상업적으로 변질됩니다. 이 부분을 스님은 가장 경계했고요. 지금은 무슨 계획을 하고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법정 스님의 열반 1주기를 앞두고 스님의 유품을 전시하는 기념관, 강원도 수류산방과 일월암, 법정 스님의 뜻을 잇는 다는 취지의 다양한 전시회와 프로젝트에 대한 계획을 듣고 싶었다. 덕조 스님은 “계획이라는 것은 우리 생각이에요. 이런 저런 일들도 뭐든지 한번은 지나가야 하는 것”이라며 포교와 법정 스님의 뜻이라는 부분에서 상충하는 일들이 많기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물이 출렁일 때 돌을 던져 더 출렁이게 해서는 안 되겠죠. 어떤 일도 아직 결정된 것이 없어요. 강원도 수류산방과 일월암은 스님이 빌려 쓰신 곳이기에 빌려주신 분께 감사의 마음을 가질 뿐이지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직 법정 스님의 뜻을 오롯이 살리면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자칫 이벤트성으로 변질돼 스님을 팔아먹는 일이 되기 쉽기 때문이죠.”
법정 스님의 눈빛과 목소리만 들어도 그 뜻을 알아차린 상좌는 지금도 스님의 살아있는 눈빛을 느끼고 있었다.

법정 스님은 유언에서 덕조 스님에게 10년간 수행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세속인의 눈에 10년은 길고 길어보였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숫자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고 하루하루 어떻게 사는냐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집에서는 뭘 해도 기본이 짧으면 3년, 좀 더 하면 10년이에요. 바깥의 10년과는 개념이 달라요. 은사스님께서 늘 어디에 얽메이지 말고‘자기답게 살라’고 했던 삶을 살아야죠. 달을 가르치는 손을 보지 말고 달을 볼 줄 알아야죠. 10년 만 살겠어요?”
법정 스님이 살아계셨다면 이번 해제 때에는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스님은 해제 때는 사회문제와 관련된 법문을 했었다. 최근 조계종의 자정과 쇄신 결사, 개신교와의 끊임없는 종교갈등, 구제역…. 많고 많은 사건 사고들을 어떻게 말했을까.

덕조 스님은 “법정 스님도 종교는 뿌리는 같다고 했다. 종교 간 갈등은 지도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대화를 해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불교계도 스스로 반성을 해야 한다. 긴장하지 않게 되면 외부의 공격을 받게 돼 있다. 또 공격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쇄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세상은 본래 시끄럽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갈등이 밖으로 토해내지는 것 뿐입니다. 세상은 조용히 돌아가는데 사람들은 파도에 돌을 던져 시끄럽게 만듭니다. ‘너 때문’이 아닙니다. 내 문제를 남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말하는 것, 자기 의견을 대중의 의견이라 말하고 자신을 대중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스님은 시나브로 법정 스님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외모도 생각도 행동도. 2시간 넘는 인터뷰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은 숲길을 만끽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후~ 조금 내려왔을까. 저녁 예불하러 가는 덕조 스님이 날라 올 듯 금새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108염주를 하나씩 건넨다. 따뜻하다. 바람 같은 스님 걸음에 따라 내려가려니 내려오는 길 또한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덕조 스님은 오늘도 행자시절 법정 스님에게 <초발심자경문>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남들이 못하는 고생을 능히 참고 견딜 수 있는 것,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삶, 비범하면서도 평범한 삶을 사는 당당한 수행자의 삶을 걸어가고 있었다.

글=이상언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un82@buddhapia.com
2011-02-24 오전 12:33:00
 
한마디
보리농사꾼 기자는덕조스님에관해서얼마나아시는지? 그사람에됨됨이를보고기사를쓰시면좋겠네
(2011-03-06 오후 9: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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