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 종합 > 사람들 > 인터뷰
[법정스님과 만난 사람들] 진명 스님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 좀 섭섭한듯만 하게, // 이별이게, /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 어디 내생에서라도 /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 연꽃 / 만나러 가는 / 바람이 아니라 /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엊그제 /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 한두 철 전 /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꼭 연꽃마지를 하러 떠났죠. 갈 때는 미당 서정주 선생 시 ‘연꽃 만나고 오는 바람같이’를 꼭 읊으면서 가곤 했어요. 백련이 지닌 깊은 기품을 스님이 참 좋아하셨어요.” 법정 스님과 연꽃 마지를 가는 풍경을 떠올리는 진명 스님. 그 눈매에 법정 스님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진명 스님은 법정 스님을 단발머리 소녀 때 출가를 결심하고 난 직후 송광사에서 처음 뵈었다. 출가해서 스님 찾아뵙고 “저 기억나세요?” 여쭈니 기억을 못 하셨다. “머리 깎고 나니까 얼굴이 많이 달라졌잖아요.”며 깔깔대는 진명 스님은 소녀 같다. 강원 졸업반 때 도반과 법정 스님이 번역한 <숫타니파타>와 <진리의 말씀>을 녹음테이프를 만들어 보시하려는 야무진 꿈을 갖고 불일암으로 스님을 찾았다. “스님께서 번역한 책을 저희들이 내레이션을 해서 포교에 쓰고 싶습니다.”고 어렵사리 입을 뗀 두 학승에게 흔쾌히 허락한 법정 스님은 “먼데까지 왔는데 국수나 먹고 가라.”며 손수 국수를 삶아주셨다. 입맛을 다시며 맛있게 먹고 서둘러 큰 절로 내려가려는데 “밤이 깊었으니 아래 다실에서 자고 아침 일찍 가라.”며 법정 스님이 붙들어 세웠다. 그 때 스님은 “요즘 운문사 소금 재고량이 어떤가?” 물었다. “요즘은 저희 형편이 좀 나아져서 그만합니다.” 답을 드렸다. 모두 어려웠을 때 얘기다. 그 뒤로도 법정 스님은 진명 스님을 보면 가끔씩 운문사 소금 안부를 물었다. 웃자고 한 얘기. 그도 이제는 다 지나간 옛이야기다. 지난여름 나그네들이 운문사 취재를 다녀왔는데 음식 맛이 ‘선열禪悅’ 그 자체였다.

- 눈코입귀가 다 있는데 왜 부처님은 없다고 하셨을까?
절집에서 가장 어리석은 물음이 스님이 출가한 까닭을 묻는 일이다. 당신 좋아서한 출가. 그 까닭을 묻는 게 딱한 일인 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다. “하하. 옛날엔 그렇게 물으면 참 싫더만요. 사귀던 사람이 떠나서 출가했나? 호기심어린 눈길로 묻기 때문에” 어려서 몹시 앓아 부모님 속께나 썩인 진명 스님은 중학교 3년 동안 절반은 학교엘 못 갔다. “링거를 딱 꽂고 있으면 심심하다고 문을 열어줘요. 문밖으로 가을 낙엽이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아릿했어요. 왜 가을이면 나뭇잎이 지나? 저 나무는 언제부터 저러고 서 있었나? 저 바위는 언제부터 저기 있었을까? 저 바위목숨은 언제 다 할까? 이렇게 아프다가 죽으면 나는 어디로 갈까? 허구 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이면 왜 이 부모님 밑에 태어났을까?” 모두 근원을 향한 물음. 세상 현상이 두루 궁금했던 소녀는 불교 책을 사 본다. 그렇게 만난 반야심경. 그 가운데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에서 딱 걸렸다. “나는 눈코입귀가 다 있는데 왜 부처님은 없다고 하셨을까?” 그게 큰 숙제였다.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가다 보니 천수경도 외우고, 초발심자경문 가운데 초심, 발심을 다 외웠다.
“그즈음 아주 생생한 꿈을 꿨어요. 꿈에 두 스님이 나를 데리러 왔어요.” 두 분 스님과 지리산 정상에 오르는 꿈. 힘겹게 오른 정상은 마치 연화장 세계 같았다. 한 분은 칠불사 주지 스님이라고 했고, 한 분은 송광사 스님이라고 했다. 그 뒤 프랑스 비구니 스님인 성일 스님과 인연이 되어 송광사를 찾았던 진명 스님,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꿈에 본 송광사 스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가. 그 스님이 바로 법정 스님이 몹시 편찮으시다는 보도가 나가자마 안거중인데도 하동 토굴에서 단걸음에 길상사로 달려온 도현 스님이다. 너무 앓다보니 의사가 되고 팠던 소녀는 도현 스님을 뵙는 순간 그 선선한 기운에 취해 “정신을 고치는 의사가 으뜸.”이라는 생각에 출가를 결심한다. “아버지가 격렬하게 반대하셨어요. 나중에는 ‘참 잘했다’며 그윽하게 바라보지만, 그때는 눈에서 불이 튀었어요.” 아버지를 막아선 사람은 할머니였다. “내가 육십 평생 살아보니까, 지 좋은 거 하고 사는 놈이 장땡이더라. 여자 인생 뭐 별거 있냐? 보내줘라. 지하고 잡아하는 대로.” 할머니가 최고 아군이었다. “나는 엄마 같은 인생 살고 싶지 않다.”고 외쳤던 소녀는 운문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20세기 끝 무렵 수행자를 향한 대중 욕구는 높아만 갔다. 수행자 생활방식은 옛 그대로지만, 인천 스승(人天師)이 되기 위해서는 불교 교학체계나 논리체계가 바로 서야겠다는 생각이 든 진명 스님. 승가대학 4년을 마친 지 한참 지나 다시 대학에 들어간다. 1992년. 대학 1학년생 진명 스님을 만난 법정 스님은 “진명이는 왜 대학을 다시 갔나? 학자가 되고 싶어서인가? 수행을 잘하고 싶어서인가?” 고 물었다. 후자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래? 내가 학비를 좀 도와줘야겠지.” 하셨다. 그리고 94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가 문을 열자, 법정 스님은 운문사 회계를 맡았던 진명 스님을 불러 살림살이를 맡긴다. “공부마치고 선방으로 바로 갈 계획이었는데 그만.” 은혜를 갚는 일로 인생행로가 바뀌었는데 후회는 없을까? “세상 모든 일이 자기와 인연이죠. 스님께 장학금을 받지 않았어도 서울에서 수도승首道僧(ㅎ)으로 살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지만 그게 내 할 일이었겠지요. 후회는 없어요.” 과연, 수도승修道僧다운 말씀이다.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 <버리고 떠나기>가 나왔을 때 제가 인지를 다 찍었거든요. 화장실 갈 때 빼고는 하루 종일 꼼짝도 못하고 찍었어요. 그런데 스님이 한 장 한 장 살펴보시고는 ‘이거 찍을 때 정신이 어디 갔었어!’하시며 조금만 비뚤어져도 난리신 거예요.” 운문사 명성 스님 별호가 0.1mm인데 법정 스님도 그 못지않으시다. 스승 마음은 다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 뒤로 진명 스님은 인지에 도장을 찍을 때 정신일도精神一到했다. “나만큼 정확하게 찍은 사람도 없을 거야. 다 찍고 나니까 스님이 ‘진명이 애썼다.’면서 몽블랑만년필을 제게 주셨어요. 늘 하시던 말씀이잖아요. 두 개를 가지면 하나를 가졌을 때 애틋함이 사라진다고.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바로 회향을 하세요.”

- 달 같은 해, 해 같은 달
진명 스님은 법정 스님 앞에서 거리낌이 없었다. 불일암 가는 차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큰 소리로 “스님, 계십니까!”하고 들이닥치는 사람들에게 느닷없는 낭패를 본 법정 스님이 “정진하고 있는데 불쑥불쑥 ‘스님 계십니까!’하고 소리를 질러내니 참기 힘들어.”하셨다. 말씀 끝나기가 무섭게 “스님! 그게 싫으시면 글 쓰지 마세요. 글을 쓴다는 건 사람을 부르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어렵사리 찾아오는 건데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 취급을 하시면 어떻게 해요? 저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하고 퇴박을 놨다. 불교 방송 ‘차 한잔의 선율’을 진행하던 고운 스님이 아니다. 테러! 진명 스님은 테러리스트다. 스님 반응은 어떠셨을까? 법정 스님은 “그래. 진명이 말이 맞다!”며 선선히 고개를 끄떡이셨다. 역시 큰 어른.
진명 스님이 맑고 향기롭게 회원화합차원에서 수련회를 운문사에서 가졌으면 좋겠다는 계획을 올렸을 때 법정 스님은 “번거롭게 하지마라. 운문사는 그렇지 않아도 울력도 많은데 스님들이 힘들지 않겠느냐.”며 완곡하게 반대했다. 진명 스님은 굴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회원을 이끄는 사람들을 모아 소속감과 자부심을 갖도록 해줘야합니다. 맑고 향기롭게 정신을 펼치는 게 우리 일인데 반대를 하시면 사무국에선 뭘 하라는 말이냐”며 거듭 말씀드렸다. 겨우 승낙을 얻어낸 진명 스님. 이번엔 법정 스님도 버스를 같이 타고 가셔야 한다고 말씀드린다. 법정 스님은 “회원들이 불편하지 않을까?”며 고개를 갸웃거리시는데. 진명 스님은 테러리스트답게 “오가면서 회원들과 함께 호흡하셔야 합니다.”고 세게나갔다. 회향 길. 도예가 지헌 선생 부인 조남숙 여사가 뒷자리에서 “스님, 우리 동요 부르기 해요.”하며 소풍 길 소녀처럼 조금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스님은 빙긋 웃으면서 “노래는 무슨.”하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뒷자리에서 시작된 노래. 마이크는 드디어 법정 스님 앞에서 멈췄다. 거절을 못하고 마이크를 잡은 스님은 “흠!흠!” 헛기침을 하곤 “법정 스님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며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벌칙은 진명 스님 몫. 우리고전음악을 하겠다면서 그 당시 크게 유행했던 <갈대의 순정> 가사를 바꿔 불렀다. “스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땡초의 순정~ 스님의 순정~” 그 노래가 나중에 산사음악회를 수놓은 <땡초의 순정>이다. 차 안에선 노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법정 스님도 마찬가지. 앞자리를 치면서 한참동안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눈물까지 흘리셨다. 그때 빠진 배꼽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법정 스님이 강원도 오두막에 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진명 스님은 드시는 게 마땅치 않으실 것 같아 주말마다 가서 챙겨드렸다. 갈 때마다 스님과 바깥나들이를 했다. “나들이 길, 절에 들려 한 바퀴 휘 돌아보면 그 도량 살림살이가 보이잖아요. 형편이 어려울 것 같다 싶으면 꼭 불전함에다 인사를 하셨어요. 다른 분들은 그런 스님모습을 잘 모를 거예요.” 스님들은 모든 절을 내 집으로 여기다보니 형편을 헤아려 보시하는 걸 놓치기 쉬운데 법정 스님은 달랐다. 진명 스님은 지금도 불자들과 사찰순례를 할 때 살림이 어려운 절에 들르게 되면 “가지고 다니면 무거우니 주머니 다 털고 갑시다. 먼지까지 다 털고 갑시다.”한단다. “한번은 길을 가는데 봉고차 옆으로 쓰러져있었어요. 스님이 그걸 보시고는 ‘쟤가 고단했나? 왜 저렇게 누워있지?’ 그러시는 거예요. 하하. 그때 마침 뿌연 하늘에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그날따라 해가 유난히 불그스름하니 아름다웠어요. 그 광경을 보시곤 ‘달 같은 해, 해 같은 달.’ 그러시는 거예요. 어느 글에 쓰셨을 거야 아마.” 사물을 대하는 그윽한 스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난다.

-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
“법정 스님이 입을 열어서 종교화합해라. 벽을 허물어라.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자연스레 다른 종교인들을 만나서 교감을 나누셨던 거죠. 삼소회 성지순례 때도 참, 끝없이 이해하고 감싸 안는 일이 참 어렵더만요. 어렵사리 회향 잘하고 돌아오니 정진석추기경님이 ‘진명스님. 부부도 해외여행을 하면 죽이니 살리니 난리치면서 올 때는 한 놈은 먼저 들어온다는데 삼소회는 성공했어.’ 이러시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스님 영향이라고 생각해요. 스님 곁에 있다 보니까 안개비에 옷 젖듯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삼소회란 1988년 세계장애인올림픽을 도우면서 태어난 종교 벽을 헌 여성 수도자 모임이다. ‘원아분신변진찰’ 부처님은 중생들 깜냥에 맞게 다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부처님 경지를 해와 달에 비유하는 까닭도 해와 달은 늘 하늘에 떠서 두루 비추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 또한 그와 같이 이 시대 큰 스승으로 두루 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빛을 자기 분상에서 만큼만 본다. 저 아는 만큼만. “저도 뭐 스님을 다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사람이기 때문에. 하지만 일흔이 넘어 여든이 되어도 스님처럼 저런 모습을 할 수 있을까? 그게 화두입니다. 하하.”

진명 스님은 딱 두 해만 살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베이징 만월사 주지를 맡았다. 그런데 벌써 세 해를 훌쩍 넘기고 어느덧 네 해도 저물어 간다. 언젠가 백두산 천지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한국에서 온 어느 스님이 “진명 스님. 여기서 수지가 맞아? 스님은 한국이 부가가치가 더 높아. 마이크 한 방이면 되잖아.”하고 말을 건넸다는데. “종단에서도 마스터플랜이 없는 게 해외포교인데 힘이 많이 듭니다.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그 누군가가 지금 저라면 수지 타산을 따져서야 되겠습니까? 세속 계산으로 보면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게 중노릇이고. 출세간 계산법으로 보면 정말 수지타산을 잘하고 사는 거예요. 도량 하나 만들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부처님께 위로받고 마음을 바로 잡고 닦으며 수행을 하는 이게 어마어마한 창출이거든요. 기도행위를 저 사람들은 뭔가 구할 게 있어서 부처님한테 가서 엎어져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는구나하면서 참 단순하게 보기도 하는데, 그 사람이 거기서 삼세 업장을 녹여낸다면 세세생생 참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때문에 스님들은 큰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거든요.” 청정한 승가 계산법은 다르다. 큰 농사를 짓는 진짜 농사꾼을 만나고 내려오는 길 발걸음이 가볍다.
글=법정 스님 자취를 더듬는 변택주,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쟁이 이종승 |
2011-02-14 오후 4:42: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