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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을 바라보는 노승이 8만대장경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어찌하여 조용히 쉬지 않고 횡야설 수야설인 <연기법의 생활>을 간행해 유포하겠습니까. 한국불교 근현대 고승인 용성진종 조사의 삶과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현대인들이 연기법의 도리를 이해하고 삶의 지혜로 삼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죽림정사 조실이자, 조계종 원로회의 원로의원인 도문 스님은 스승인 용성진종 조사의 삶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발자취를 더듬었다. <연기법의 생활>은 이런 용성진종 조사의 생애와 사상을 담고 있다. 불심도문 대종사는 1946년 용성진종 조사의 수법 제자인 동헌완규 조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은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불교와 한국불교의 원융화합을 명분 삼아 정치적·종교적으로 한국의 정신문화 해체를 시도했다. 당시 ‘조선왕조 마지막 대강백’이라 불리던 이회광 조차도, 1908년 전국사찰대표 60여 명을 모아 일본 정토종을 표방한 원종(圓宗)을 창립해 친일행위를 하기에 이르렀다.
경술국치(1910)에 이회광은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과 연합 맹약을 체결했고, 그 소식이 한국에 알려지자 한국의 스님들은 이회광을 중심으로 한 원종의 행위를 ‘매종역조’로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일본 정토종은 양산 통도사를 자신들의 종단 말사로 삼으려는 야심을 품었다. 일본 조동종은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 종단에 병합하려는 야욕을 드러내며, 일본 임제종이 조선 임제종과 한 근원이라 주장하는 등 조일불교 단합관할을 꾀했다.
결국 범어사와 통도사는 연합해 서울 인사동에 조선불교 임제종 선종교당을 설립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때 용성진종 조사가 개교사장(開敎師長)으로 등단했다. 스님은 범어사 성월, 만해 스님 등과 임제종 운동에 앞장섰다. 이어 1911년 서울 종로에 대각사를 창건하고, 3·1운동(1919)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를 대표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스님은 이일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출옥 후, 스님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다. 1922년 중국 연길에 대각교당을 설립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가 하면, 국내에선 독립군의 군자금을 모금해 독립군을 도왔다.
일생을 독립운동과 불법포교에 이바지했던 용성진종 조사는 수법제자인 동헌완규 조사에 유훈10사목(遺訓十事目)을 부촉하고, 불자들에게 5대 수행을 권장했다. 용성진종 조사는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승려로서의 본연의 모습도 잃지 않았다. 불심도문 대종사는 1983년 동헌완규 조사가 열반하면서 용성 조사의 유훈 10가지를 실현하는데 진력해왔다.
유훈 10사목은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불교의 초전법륜 폐허성지를 잘 가꾸는 것을 비롯해, 부처님이 탄생하신 네팔 룸비니원, 불타 불적 5대 성지를 가꾸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연기화엄부, 소승아함부, 대승방등부, 공혜반야부, 실상법화부, 원적열반부인 6부의 한문경전을 한글로 번역해 대중에게 지혜의 안목으로 삼도록 했다. 또한 참선, 염불, 간경, 주력, 불사의 5대 수행을 강조하며, 이 수행이 갖는 의미와 방법론에 대해서도 전했다.
도문 스님은 “온 인류가 5계(五戒)를 받들어 십선수행(十善修行)하고,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를 알아 십바라밀을 행함으로써 성불인연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모든 사부대중이 이 책을 통해 성불인연이 지어지기를 발원하며,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불타의 가르침과 조사의 교훈을 받아들여 높은 이상과 넓은 배움, 깊은 깨달음으로 종교분쟁의 씨앗을 소멸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문 스님은 <연기법의 생활>을 전국의 각 사찰과, 이웃종교, 지방자치단체 등에 법보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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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의 생활|불심도문 대종사 지음|죽림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