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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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과 만난 사람들]조각가 최종태
입고출신入古出新, 고전으로 들어가 새 길을 내다

“올해, 추사가 연경(베이징)에 다녀온 지 200년째 되는 해라서 올초에 전시회가 많았는데, 추사가 입어유법入於有法, 출어무법出於無法, 아용아법娥用娥法 이 세 마디를 했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여?”
반어. 일깨워 주기 위한 물음이다. 연남동 작업실에서 만난 길상사에 관세음보살 석상을 조성한 최종태 선생(79)은 아직도 열정이 넘치는 청년이다.
“그 땐 중국이 세계였으니까. 세계미술사를 공부하러 들어가서 이걸 다 졸업을 하고 무법으로 나왔다는 얘기에요. 그런데 지금은 내 법으로 그린다. 이게 제주도 가서 한 얘기에요. 추사 글씨가 거기서 완성이 됐거든요. 지금 내가 하는 게 그거에요. ‘아용아법娥用娥法’, 이게 됐는지 안 됐는지. 세계미술사를 다 봤는데 이걸 다 소화하고 없어져야 돼. 그런 연후에 내 그림이 나온다 이거에요. 그런데 지금 나는 어느 단계에 있나 이걸 관찰하는 거지. 조금 덜 됐나? 어느 정도 된 건가? 되면 굉장히 좋은 건데 이거 된 사람이 없어요.”

조각을 하다 보니. 늘 서양 사람들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청년 최종태는 당당히 내발로 서기 위해 조선미술사를 비롯해 우리나라 역사를 배웠다. 순전히 혼자 힘으로. 1965년 무렵 어떤 조각을 할 것인가? 고민을 거듭하는 청년 최종태 앞에 반가사유상이 섬광처럼 나타난다.
“거기서 작품방향이 딱 섰어요. 아! 나는 이 길로 간다.”
법정 스님은 반가사유상에는 거리낌 없는 무애無碍 미가 담겨 있다며, 작품에 깃든 아름다움이 거리낌 없을 때 감동을 주는데, 거기에 작가 혼이 서려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어르신들 만남이 늦었을 뿐, 절대 미감으로 일찍부터 통했다.
한국미술사를 하다보니까 자연스레 중국을 보게 되고 중국을 보다보니 인도, 파키스탄과 이어지고 그리스와 연결되었다는 최종태 선생은 이집트, 그리스, 중동을 두루 살핀다.
“서양이라고 하는 건 본래 없었어요. 본디 야만인데 그리스를 업고서 서양문명이 시작됐지. 실은 그리스도 중동이에요. 그리스가 이성이라면 이집트는 영성이라고 해야지.”
그 밖에 에스키모, 멕시코, 아프리카 조각, 남태평양 미술을 두루 섭렵한 선생은 “지금도 내 형태가 만들어진 것 같지 않아요. 아직도 더 받아들여야 하나? 생각하고 있어요. 미술대학 나오고 쉰 해가 더 지났는데, 아직도 방황을 하는가 보다 그런 생각이거든요. 하지만 방황을 하더라도 열어야지 어떻게. 그게 무서워서 닫으면 되나?”

떴다 감았다 못하면
71년 불혹 나이에 미술 자취를 더듬어 세계를 돌던 선생은 이집트 미술을 대하곤 눈물바람을 했다.
“돌덩어리에다가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게 이집트에요. 그리스는 너무 깎아가지고 생명이 약화됐어요. 설명하면 약해지잖아. 우리나라 불상이 좋은 건 근육, 힘줄 이런 게 없어요. 그런 게 있으면 눈길이 그리 가고 정신이 팔려서 불상이 주는 숭고함이랄까. 철학이고 뭐고가 안 돼요. 내가 처음 그리스 조각을 보면서 ‘하, 이 사람 힘들겠다.’ 싶었어요. 맨날 눈을 부릅뜨고 있잖아요. 저기 내 작품. 저 안엔 뜨고 감은 게 다 있어요. 저걸 감았다고 볼 수도, 떴다고 볼 수도 없어요. 부처님 눈 같이 그냥 있는 것이지. 감았다 떴다를 못하면 살아있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 내가 반가사유상 눈을 떠올리지 못해요. 전체가 보이기 때문에 눈에 눈길이 안간 거죠.”
이 어른에겐 조각품도 살아있는 존재다. 김홍도나 신윤복 그림을 봐도 그냥 점을 쿡 찍거나 쿡 눌러서 추슬렀지 세세하게 눈동자나 눈꺼풀, 눈썹을 그려 넣지 않았다. 그래서 은근하고 정겹다. 법정 스님도 말씀했다.
“아름다움에는 여백이 있습니다. 여백은 그 그림 격을 좌우합니다. 덜 채워진 부분 좀 모자라는 구석이 있어, 그립고 아쉬움이 따라야 합니다.”

입고출신
24살 때 연경으로 건너가 첩학帖學과 금석 대가인 옹방강 서법을 따르던 추사는 서법 원류를 거슬러 당에서 남북조 다시 위진에서 한예漢隸에 이르고, 예隸 뿌리가 전篆이라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침내 추사는 예隸를 쓰기 시작했고, 동한東漢 예서가 파임과 비침으로 외형미가 두드러진데 아쉬워하며 다시 서한예西漢隸에서 본령을 찾으려고 애쓴다. 추사는 그 과정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내 팔뚝엔 308개나 되는 중국 명비문이 들어 있다.”고.
‘입어유법入於有法’ 추사는 이렇게 기본, 틀을 익혔다. 고전으로 들어가 기초를 다진 추사는 타고난 기량에 집념어린 열정으로 자신을 불살라 ‘출어무법出於無法’ 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예서 그쳤다면 ‘단군 이래 으뜸가는 예술가는 그래도 추사’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제주도로 귀향 간 추사는 늘 주장하던 청고고아淸古高雅한 서법에서 벗어나 “내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구멍을 냈고 내가 써서 몽당붓이 된 붓이 천 자루는 된다.”고 외칠 만큼 그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써오던 글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쓰고 또 쓴 끝에 기굴분방奇?奔放, 자유로워졌다. ‘아용아법娥用娥法’ 그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는 주착主着. 그 경지를 추사는 스스로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고 했다.


소녀상과 최선생의 얼굴은 겉에서 대비되지만 속마음은 다르지 않다. 신을 향한 순수한 마음의 최선생, 세상을 보는 맑은 마음의 소녀상은 그 본류에서부터 닮았기에 선생은 선생대로 조각은 조각대로 세상을 정화시킨다. 법정스님과 선생의 인연의 산물인 길상사의 관음석상은 정화에 더해 법을 향한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던 스님의 ‘무소유’를 보는 이들에게 스스로 물어보게 하는 표지로 세상에 남아있다.


“추사가 조선 역사를 봤잖아요. 그리고 당시 중국은 세계인데. 그걸 다 훑었어요. 하지 말라는 불교공부도 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집대성된 거예요. 아까, 입고출신? 그래 이걸 해야 해요. 지금 불교미술이 入古는 생각하는 데 出新이 안 되는 거야. 그거하려면 세계미술사를 다 봐야 해요. 우리나라 불교미술이 중국, 인도까지 두루 훑어서 나온 건데. 지금은 서양현대미술도 봐야 해요. 가슴을 열고 다 받아들여야죠. 목적이 지금 얘기를 하는 거잖아요? 새롭게. 지난 얘기만 자꾸 되풀이해서 되겠어요? 현대미술을 다 꿰뚫은 불상이 나와야 해요. 김수환 추기경은 자유로워요. 재미나는 게 여러 해전 성균관에서 상을 받았는데 그 다음날 성균관 선생님 묘소 참배를 하러 가야했어요. 모든 눈길이 김추기경에게 쏠렸어요. 추기경이 절을 할 것인가? 조마조마해했어요. 그런데 이 어른 넙죽 절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어떻게 절을 다 하시냐는 물음에 추기경은 ‘내가 존경하는 큰 선생님한테 절하는데 뭐가 어떠냐?’면서 되레 의아해 했어요. 법정 스님 법회에 가보면 말이 아주 편하게 들려요. 서양 철학을 비롯한 책을 많이 읽어서 사물 이치를 두루 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쉬운 말이 나오잖아요. 어느 날 신부님들하고 밥 먹는 자리에서 장난삼아 ‘신부님들 좀 설교를 조선말로 좀 합시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옆에 있는 신부님이 ‘왜 조선말로 하는데 그러냐?’더라고. 그 말끝에 저쪽에 앉아있는 양반이 빙긋 웃던데, 그 양반, 알아들은 거여.”
이 어른, ‘지금 여기’에서 새 길을 열라는 말씀이다. 入古出新.

아시아 빛!
1971년 이곳저곳 세계 미술들을 두루 돌아보면서 반가사유상과 석굴암 부처님생각이 간절했던 최종태 선생. 돌아오자마자 반가사유상을 보러 국립박물관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곤 다음날 석굴암으로 날다시피 내려갔다.
“표 받는 스님이 어떤 서양 사람이 표를 사가지고 네 번을 다시 오더래. 또 한 번은 어떤 서양 사람이 나오면서 ‘내가 분명 모자를 쓴 채로 들어갔는데 지금 이렇게 모자가 손에 들려 있으니 무슨 조화냐?’고 묻더래요. 조각 앞에서 저도 모르게 모자를 벗다니. 그게 뭐냐 이거에요.”
백제, 신라 사람들 불법을 만나고 나서부터 그 유명한 금관도 만들지 않고 크게 짓던 고분도 자그맣게 줄이고 오로지 부처님을 위한 사리탑과 사리함,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불국토 조성에만 열을 올렸다. 그 공력, 그 정성이 천년 세월을 뛰어 넘어 서양에서 온 나그네 발걸음을 묶어두고 모자까지 벗겼으리라.

석굴암 불상, 반가사유상, 일본 호류지에 있는 백제관음은 처음부터 중국이나 인도 불상과는 다르게 독특한 우리 빛깔을 드러냈다. 그랬기에 삼국시대불상과 고려불화는 지금 세계미술사에 우뚝 서게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로마에서 우연히 어떤 책에서 봤는데 석굴암 불상이 ‘아시아 빛이다.’고 나와 있더래요. 참. 누가 잘 쓴 거야. 아시아 빛! 신라, 백제가 한국다운 불상을 그려냈잖아요. 당나라, 인도, 파키스탄 불상을 다 보고 나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처럼 오늘날에는 서양미술을 다 봤잖아요. 그 속에서 나와야 해요.”
관음상이 다 깎여진 뒤 법정 스님과 류시화 시인이 관음상을 처음 만나러갔을 때 관음상 옆에 어마어마하게 큰 불상이 서있었다. 그 불상을 본 법정 스님이 “저러면 안 되는데….”하셨단다.
“대개 보면 형태가 커질 적에 종교 심성은 낮은 거예요. 속이 허할 때 포장하려드는 거죠. 반가상 조그마한 게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되는 건데 고려 후대로 와서 불상이 커져요.”


선생의 백발은 고왔다. 눈웃음과 미소역시 그랬다.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드러난 모든 것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세파를 구도의 열정으로 넘었기 때문이리라. 백발,눈웃음,미소들은 선생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나타내주는 것들이었다.

화관, 정병, 구고!
선생에게 관음보살상 조각은 오랜 숙원이었다.
“반가상을 하나 만든 적이 있었어요. 흙을 붙여놓고는 부리나케 국립박물관으로 달려갔어요. 너무 닮았으면 어쩌나 해서. 다행히 그렇지는 않더라고.”
선생말씀을 들으면서 “난 나이고 싶다.”던 법정 스님이 떠올랐다. 길상사에 관음상 만들기 위해 선생 댁을 찾은 법정 스님에게 묻는다.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이 뭡니까“
”화관花冠입니다.”
“손에 들고 있는 병은 뭐죠?”
“정병淨甁입니다.”
“손바닥을 펼쳐 올린 까닭은 무엇인가요?”
“구고救苦입니다.”
짧은 선생 물음에 법정 스님 또한 토씨 하나 안 붙이고 외마디 답으로 일러주셨다. ‘꽃 관, 맑은 물, 세상고통을 구한다.’는 세 마디 말씀을 듣는 순간, 작품이 다 그려졌다는 선생은 이튿날 흙일을 일사천리, 세 시간 만에 다 끝내고나서 길상사로 전화를 했다. 뜻밖에도 법정 스님이 직접 받으셨다. 다 됐다 하니 그럼 지금 가보겠다고 했다는 말씀을 하면서, 선생은 관음상 조성을 돌아본다. “스님과 내가 뜻이 맞아 길상사 절 마당에 관음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억겁 시간 속에서 우리 두 손이 잠깐 하나로 만나서 한 형상이 태어났습니다.” 점안식 날 법정 스님은 관세음보살과 성모마리아는 그 상징성이 같다는 말씀을 했다. 그 자리에서 불모 최종태 선생은 짧은 인사에서 “땅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종교가 울타리를 허물면 한마당이 될 것입니다.”고 했다. 이 일이 비록 작은 일긴 하지만 결코 작은 일만은 아니라면서 당신 생각과 모든 바람을 다 쏟았으니 모든 이야기는 형태가 말할 것이라고. 우리나라 불상은 우리 소녀를 그려냈다는 선생은 평생 소녀상만 조각하고 그렸다면서 한국 조각가 가운데 당신처럼 불상 영향을 크게 받은 이가 없다고 힘주어 말씀한다.

71년 일본 호류지(法隆寺) 툇마루에서 처량하게 비 맞고 서있는 나무로 깎은 백제관음을 보고 가슴 아려했던 선생은 그 백제관음이 당신이 가장 아끼는 관음상이라고 말씀한다. 언젠가 프랑스 앙드레 말로가 일본을 보고 돌아갈 적에 공항에서 만난 기자가 ‘만약 일본이 바다로 가라앉는데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백제 관음이다.’고 답을 했다는데. 앙드레 말로가 길상사 관음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눈이 열렸다!
쉰 살.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조각이라고 하는 건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그냥. 팍 들어오는 거여. 뭐 생각할 여지가 없었어요.” 모른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선생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선언했다. “조각이라고 하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모른다는 걸 알고 날듯이 기뻤다는 이 어른, 하늘 뜻을 알았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내가 뭘 알아. 그림에 대해서 내가 몇 만분지일을 체득한 것뿐이지, 그림세계라고 하는 건 여전히 미지 세계에요. 이따가 내가 어떻게 그릴 지도 모르는 건데 뭐.”

시공간을 버리고 우레 같은 침묵으로 돌아간 법정 스님과 인연을 돌아보는 최종태 선생. 오래 전 선생이 아직 젊었을 때 불경공부를 하고 난 뒤 성경이 하룻밤 새 다 읽혔는데 그 까닭을 몰라 오래도록 궁금해 하다가, 법정 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물었다. 스님은 “경을 읽는 눈이 열렸다.”고 했다. 40년 묵은 숙제가 단칼에 풀렸다고 말씀하는 선생 눈이 그윽하다.
“법정은 맑아요. 맑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 맑음이 옮아요. 가슴속이 눈 쌓이는 밤처럼 시원해요. 좋은 그림 앞에 있으면 좋은 기운이 내 마음에 스며들어오는 것처럼.”
선생은 지난 2월 하순 스님을 마지막 뵈었다. 스님은 보자마자 원願은 여전한데 한계가 있다며 당신은 다 내려놓고 떠날 차비를 하시면서도, 마치 ‘당신을 뵈면 가슴 속이 눈 쌓이는 밤처럼 시원하다’는 선생 말씀이라도 들은 듯이 “퇴원하면 강원도 눈 보러 갈 것”이라며 농을 던지셨다는데….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달이 연못에 들어도 물에는 흔적 없네.
글=법정 스님 자취를 더듬는 변택주,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쟁이 이종승 |
2011-01-19 오후 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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