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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대한 희망이 전혀 없습니까?”
[밀레니엄토크] 폴 니터와 수좌와의 대담
2010년 마지막 밤 대구 동화사 설법전은 서슬퍼런 선기와 같은 칼바람이 몰아쳤다. 동화사 금당선원 수좌스님들과 폴니터 교수의 릴레이 토크는 활발발(活潑潑)했다. 동화사 주지 성문 스님, 부주지 해월 스님, 금당선원장 지환 스님, 강주 선지 스님을 비롯해 수좌스님들과 신도들이 설법전을 가득 메웠다. 불교와 기독교의 이해, 종교간 대화의 가능성과 간화선 세계화 등의 문답이 오갔다. 대화는 주로 폴니터 교수에게 질문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나, 니터 교수도 대화 도중 질문을 하며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불성과 그리스도성은 같다
지환 스님
: 기독교인에게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폴 니터
: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이해를 초월한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성 아퀴나스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이해는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 너머에 있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만져질 수 있는 물건을 가리키듯이 절대로 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개인 혹은 공동체로서 경험한 것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상징은 3가지 형태로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어머님’ 이라고 할 때의 인격적인 존재로의 하나님, 말씀ㆍ진리의 하나님, 영ㆍ성령의 하나님으로 나눠집니다. 불교의 은유법을 들어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저와 같이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언어와 표현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손가락과 달을 동일시합니다. 이를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지환 스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불교의 불성(佛性)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폴 니터
: 불성(佛性)은 그리스도성(性)나 비슷하다고 봅니다. 또한 불성을 통해 그리스도성을 유추해 볼 수도 있죠.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카르트(Meister Eckhart)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특히 마이스터 에카르트, 쿠자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 등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타자이자 자아로 표현했습니다. 쿠자의 니콜라스는 하나님을 ‘비타자(非他者)’라 했지요.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대승불교에서 공(空)과 색(色)을 다르다고 보는 동시에 공이 색이고 색이 곧 공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불교를 통해 제가 하나님에 대한 비이원론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대화해야만

지환 스님
: 기독교인 대다수가 에카르트나 폴 니터 교수님 같은 열린 신학자들과 같이 이해한다면 종교간 갈등은 해소될 것 같습니다. 현재 미국 주류의 기독교가 교수님과 같이 비이원론적인 이해를 하나요?

폴 니터
: 현재는 아닙니다. 하지만 보수 기독교인과 진보 기독교인 간의 대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저는 보수주의ㆍ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초청을 받아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토론을 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완전한 합의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저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입니다.
앞으로 진보주의 기독교인과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대화가 종교간 평화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스님들이 근본주의ㆍ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을 초청해 대화를 나누자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환 스님
: 대화가 폴 니터 교수님처럼은 어렵겠지요. 하지만 진정성만 있다면 충분히 소통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해월 스님
: 한국 기독교는 자본주의가 결합한 원리주의, 복음전파주의입니다. 종교, 정치, 경제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습니다.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민족과 종교, 사람들의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개신교와 불교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폴 니터
: 우리 기독교인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습니까? (웃음) 종교갈등이 하나의 사실로 우리에게 존재함을을 염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종교와 권력이 관계를 맺게 될 때 종교는 권력을 이용하려는 의지가 생깁니다. 이때 우리 종교만이 유일하고 가장 올바르고, 가장 좋은 것이라 여기며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유럽에서 권력의 종교가 돼 왔습니다.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함께 성장했습니다. 기독교만이 유일하고 올바른 종교이며, 하나님에게 유일하게 선택받았다는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오랫동안 가르쳐왔습니다. 하지만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회를 통해 ‘다른 종교 안에도 진리가 있고, 하나님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개신교 또한 세계교회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es)를 통해 가톨릭과 같은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다른 종교화의 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종교간 대화의 움직임은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근본ㆍ보수주의 기독교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크게 도움 되고 적용할 만한 사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불교와 기독교간의 대화와 협력의 사례와 모습을 보여주고 보수 기독교인들을 초청해 대화를 나눈다면 그들이 잘못된 신앙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친구’

수좌스님
: 부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부처님과 예수님은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소통이 가능합니까?

폴 니터
: <부처님과 예수님의 대화>라는 책을 썼습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매우 다르지만, 차이가 있는 친구들이라고 썼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전통 문화를 체험했고, 유대교의 문화적 전통 안에서 그 언어와 상징을 사용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했습니다.
부처님은 북부 인도에서 힌두 전통 문화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브라만, 아트만, 윤회, 까르마 등 힌두교의 기본 사상을 극복하면서 ‘무아(無我)’ 등을 말씀했습니다. 즉 자신이 처한 문화적 상황과 조건에 알맞은 상징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문화적 차이는 있었지만 내적 평화에 이르렀고, 그 내적 평화를 모든 존재를 위한 사랑과 자비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비슷한 분이라고 봅니다.
스님, 스님은 다른 수행을 할 수도 있는데 어떤 조건과 인연으로 불교수행을 한다고 보시나요?

선지 스님
: 인간의 근본적인 고(苦)의 문제에서 출발해 수행을 합니다.

폴 니터
: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인생과 세계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만약 스님께서 한국에 태어나지 않고 기독교나 유대교 등의 다른 전통 문화권에서 태어났다면 그 전통에 따라서 인격적 경험이 이뤄지고 또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 예수님 모두 고통의 문제에서 출발했고 마음ㆍ의식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했습니다. 다만 마음의 변화를 불교는 ‘깨달음’으로 기독교는 ‘회개’라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사회참여도 깨달음만큼 중요

폴 니터
: 기독교인으로서 누군가 가난과 폭력으로부터 고통 받는 것을 볼 때 제가 그런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음식이나 약을 주어 배고픔을 해결하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굶주림과 폭력의 근원적 원인인 사회구조와 질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님들께서는 마음을 먼저 닦기 전에는 사회구조 질서를 바꿀 수 없다고 하시는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변화가 자동적으로 사회구조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성문 스님
: 상당수의 출가 수행자가 치열하게 고민하는 부분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불교가 사회 부조리와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등한시 한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결코 사회 현실을 등한시 하지 않습니다. 불제자들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두 가지 과제의 조화와 선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 왔습니다. 특히 출가 수행자는 얼마만큼 자기의 깨달음의 바탕위에 중생 구제에 나설 것이가를 두고 상당히 고민합니다. 수레가 양 바퀴로 굴러가듯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선원에서는 2000여 수행자들이 뼈를 깎는 용맹전진을 하고 있습니다. 수레가 양 바퀴로 굴러가듯이 지금 역시 그 수행의 전통, 정신적 보고(寶庫)로서 정신의 축이 되고 있습니다. 부족함이 있으면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봉사 실천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수좌 스님
: 스스로 정화되지 못하면 사회, 국가가 정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과 예수님이 완전한 마음의 정화를 이루지 않은 채 사회정화를 위해 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폴 니터
: 그들이 마음 정화를 위해 가든지, 피곤해서 아예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정화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바깥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사회를 동시에 정화 해야 합니다.

#참선이 온전한 기독교인 만든다

능혜 스님
: 한국 간화선이 서양에서 제대로 꽃피울 수 있겠습니까?

폴 니터
: 지금 미국에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선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제 친구는 신부였는데 일본에서 불교를 공부해 선사가 됐습니다. 지금은 선센터를 운영합니다. 미국과 유럽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그들이 교회와 회당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해왔고, 소음을 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와 회당에서 말보다는 침묵을 강조하는 운동을 하고 있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향신기도(신학영성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불교 참선 수행을 오랫동안 한 후 향시기도를 경험했을 때 “아! 이것은 그리스도식 참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묵조선을 해오던 제가 오늘 진제 스님에게 간화선을 처음 배웠습니다. 화두 참구는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명상수행법이지만 반드시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하고 탐구해야할 수행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좌스님
: 1980년대부터 명상을 해왔다고 들었습니다. 명상을 통해 내적 평화, 마음의 완성을 이루시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명상을 하십니까?

폴 니터
: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불교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 명상 수행은 제가 기독교 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기독교의 경험과 믿음에서 기독교인이 믿는 영, 성령, 자비의 에너지가 그리스도안에서 경험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스님안의 불성을 깨닫고 실행하려고 하는 것처럼, 저도 기독교인으로서 제 안의 그리스도성을 깨닫고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정리=이상언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un82@buddhapia.com
2011-01-12 오후 7: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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