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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에서 배운다] 금강경 독송회
‘금강경’ 대중화 활성화 … 1968년부터 보시행

#돈 벌어 남 주는 것도 수행
금강경독송회…아침 저녁 30분씩 경전읽기


구랍 19일 부천시 송내 남부역 부근 금강경독송회(이사장 김동규) 법당에서 30여 재가불자들의 진지한 <금강경> 독경소리가 새어나왔다. 독송회는 일반빌라를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큰 법당 격인 마루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 병풍과 두 장의 도톰한 방석 위에 올려놓은 <금강경>이 다였다. 불상은 없었다. 독송을 마치고 김동규 이사장(76)의 법문이 이어졌다.

“인생에는 경제ㆍ법률ㆍ정신생활 등 3가지 궤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빚쟁이 자격으로 왔어요. 수행은 노동하지 않고 벽을 쳐다보는 일이 아니라 경제생활 속에서 탐심을 닦은 것입니다. 돈을 벌어서 빚쟁이에게 나눠주다 보면 탐심을 깨치게 됩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강제 규범, 규칙, 습관 모두가 법률생활입니다. 법 아래에서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진심(嗔心)을 닦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정신생활입니다. 정신생활은 몸뚱이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 경험을 관조하고 이해하며 바르게 실행하면 탐ㆍ진ㆍ치가 깨달음이 됩니다.”

김동규 이사장은 일상 속 수행을 강조했다. 그는 경제, 법률, 정신생활은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기에 탐심을 닦는데 경제생활을, 진심을 닦는데 법률생활을, 치심을 닦는데 정신생활을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의 법문은 자신의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지만 그의 스승인 백성욱 박사(前 동국대 총장)의 가르침이 바탕이 됐다.

백성욱 박사는 불교의 현대화ㆍ대중화ㆍ생활화에 힘써왔다. 그는 “건물이 현대화 된다고 현대화 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집에서 각자가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 대중화가 아니다. 눈 뜬 대중이 많은 것이며, 스님도 아니고 부모형제 처자권속 가솔이 딸린 몸이지만 아침에 남보다 30분 먼저 일어나 <금강경>을 읽고 저녁에는 남보다 30분 늦게 자고 읽는 것”이라고 지도했다.
“성직자라 해도 생각이 세간을 향해 있으면 출가한 성직자로 볼 수 없고, 세간에 있는 범부라해도 생각이 늘 부처님을 향해 있으면 출가자이다.”
산 속이나 법당에 가야 수행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백성욱 박사는 1910년 정릉 봉국사에서 최하옹 대선사를 은사로 출가해 경성중앙학림 졸업,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파리 보배 고등학교, 남독일 벌쓰부르그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1925년 <불교순전철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8년 금강산 장안사 안암암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대광광불화엄경>을 제창했다. 1950년 내무부 장관 취임, 1953년 동국대 총장 취임, 1962년부터 부천시 소사에서 백성농장 경영하며 후학을 지도하고 1981년 입적했다.


금강경독송회는 1968년 4월 창립했다. 30~40년 전만해도 <금강경>은 지금처럼 대중화 되지 않았다. 고승들이나 공부할 수 있는 경이고, 영험이 많다는 신비한 경이라 재 올리는 데 소쇄용으로 썼지 아무나 공부할 수 있는 경이 아니었다. 백성욱 박사와 김동규 이사장를 비롯한 제자들은 백 박사가 한문에 토를 단 <금강반야바라밀경> 초판을 발행하고, 전국에 <금강경>을 보시하기 시작했다. <금강경>의 본격적인 현대화ㆍ생활화ㆍ대중화가 시작됐다. 1976년 <금강반야바라밀경 해설집>초판 발간, 1988년 <금강경을 통한 불교 수행요체> 발간을 비롯해 서울ㆍ대구ㆍ부산 금강경독송회 정기법회 개최, 2005년 금강경독송회 사단법인 발족, 2009년 10월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 700-12로 법당 이전 개원 매월 1,3째 주 오전 10시 정기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2009년 11월 <활불로 추앙받던 백성욱 박사님의 금강경 이야기>를 출간하고, 2010년 5월 포켓 사이즈 경전을 37쇄 인쇄를 해 발행해 보급에 나서고 있다. 독송회는 2011년 백성욱 박사 기념사업회를 발족할 계획이다.
(032)666-6601


#“‘금강경’이 나를 살렸다”
인터뷰-금강경독송회 김동규 이사장


1968년 김동규 이사장은 스승께 물었다.
“선생님, 제가 소사도량에서 나온 이후 눈이 나쁜 보살을 위해 <금강경>을 사경해 주었는데 그것을 보는 보살마다 한 권씩 사경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 분들을 위해 다른 일을 제쳐놓고 <금강경> 사경에만 매달려도 괜찮겠습니까?”
백동욱 박사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중들을 향해 답했다.
“<금강경> 공부를 하려면 <금강경>책이 있어야지. 붓으로 사경하는 것은 한 두 사람의 일이지요. 이 시대에는 인쇄술이 발달했으니 인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수지 독송케 하는 것이 큰 복덕이지요.”
1968년 <금강반야바라밀경> 초판 작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는 <금강경>을 인쇄를 맡길 만한 곳이 없었다. 불교청년회 선배 김상준 씨는 조계종 종정 청담 스님께 소개장을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청담 스님은 해인사 일타 스님에게 “여기 김동규 처사가 금강경을 간행코자 하는데 스님이 고려대장경 중 <금강경>을 내주어 협조해 주라”는 소개장을 가져왔다. 그런데 김동규 이사장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는 선생님이 재가자들이 평소에 경전과 가까이 지내고 독송할 수 있는 책자의 간행하려는 의중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은 당시 전 국민의 국력이 모아진 것 백성의 혼이 담긴 것이지만 목판활자 인쇄는 너무 커서 대중성이 없었다. 손가방에 넣고 지닐 수도 없어 선뜻 내키지 않았다. 김동규 이사장은 백성욱 박사의 의중을 읽어 재가들이 수지독송할 수 있는 크기의 경전을 인쇄해 보급하고 전국에서 법회를 하게 됐다.

김동규 이사장은 1965년 출가를 결심하고, 주변 인연들과 관계를 정리하다 법우의 소개로 백 박사를 찾아가게 됐다. 생활은 곧 수행이라는 가르침을 따라 매일 같이 독송을 하고 있다. 출가하려던 김 이사장은 백성욱 박사가 맺어준 인연에 결혼까지 했다. 그리고 재가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무역회사에서 다니던 김 이사장은 외국 바이어들을 상대하면서 담배를 하루 2갑 반을 피웠고, 주당으로 불릴 만큼 술도 잘 마셨다. 그러던 중 당뇨병을 얻어 12년간 고생을 했다.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는 ‘곳 죽을 놈’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는 매일 등산과 <금강경>을 독송하며 정진했다. 본격적으로 100일 기도에 들어갔고 회향에 이어 100일 기도 입제에 들어갔다. 문득 정신이 맑아졌다. 탐진치가 사라졌고 당뇨는 기적적으로 완치됐다. 김동규 이사장은 “범사에 감사하고, 일상에 감사하고 소중히 여겨라. 떠나려 하지말고, 무언가 이해를 하고 실천을 하면 삶 속에서 깨달음이 온다”고 강조했다.

그는 <금강경>은 “깨치는 것이다. 불교에 가둬둘 경전이 아니며, 불자만을 위한 경전이 아닌 인류구제를 위한 경전이다”고 강조했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곳에서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불교 경전의 요체라고 설명했다. 경전이 어렵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경전은 문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수지독송 할 것을 귀띔했다.
김동규 이사장은 “얼마나 마음이 향하느냐가 중요하다. 어렵고 쉽고는 떠나야 한다”며 “모든 해답은 자기 내부로부터 나온다. 인생이 뭐냐고 아무리 일러줘도 개인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김 이사장은 “100일을 기준으로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나머지 생활하는 시간에도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부처님께 바쳐버린다면 밝은 생각으로 살라. 곧 자기 몸을 형성하는 세포가 밝은 생각의 영향을 받아 본래의 모습을 깨치게 된다”고 덧붙였다.


#거사와 경전
‘거사’는 부처님 당시 장자 혹은 부호 상인들을 일컫는 호칭였다. 그들은 대부분 불교를 믿고 따랐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아난다, 핀디카, 욱가, 장자 등이다. 대승경전인 <유마경>에서는 빌말라끼르띠 혹은 뮤마힐 , 무구칭을 유마 거사로 불렀다.
대승경전에서 본격화한 거사와 부인은 재가 불자를 일컫는 호칭으로 자리매김 됐다. 유마 거사와 승만 부인은 대승불교가 제시하는 가장 구체적인 인간상이다. 특히 대승 불교는 출가와 재가에 차별을 두고 성불의 유무를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성 거사 원효대사’와 덕만 부인 선덕여왕‘이 재가 불자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잘 알려진 거사로는 신라시대 부설 진광세 거사를 비롯해 고려시대 청평 이자현 거사, 조선시대 월창 김대현ㆍ이침산 거사가 있다. 대한시대 백봉 김기추, 종달 이희익, 무애 서돈각, 불연 이기영, 백성욱 거사 등이 있다.
<금강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경전 중 하나다. <금강경>은 고려대장경 권 5에 수록돼 있고, <대정신수대장경> 권8에 수록돼 있다. 선종, 교종을 막론하고 중시된 <금강경>이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단 신라 진흥왕 26년(서기 565)에 진나라의 사신 유사와 승 명관이 경장과 논장 1700여 권을 가져온 사실과 진흥왕 37년(서기 576)에 안흥법사가 중국에서 구법하고 돌아올 때 <능가경>과 <승만경>을 가져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때를 전후 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상언 기자 | un82@buddhapia.com
2011-01-12 오후 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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