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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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을 만난 사람들]-장익 주교
너는 너 세상 어디에 있느냐

“스님! 불 들어갑니다.”
“나 죽으면 거창한 다비식이나 화장 의식을 치르지 마라. 입던 승복 그대로 입혀서 즐겨 눕던 대나무 침상에 뉘여 그대로 화장하라. 사리 따위를 수습하려 들지 마라. 부처님 진신 사리는 어디 있는가? 진짜 법신 사리는 부처님 가르침 바로 그것이다.”
스님은 평소 말씀하시던 대로 단출하게 ‘비구 법정比丘法頂’ 위패 하나 앞세우고 불에 드셨다.
“다비할 때는 못 가고 불교티비로 다비식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혼자서. (그때 심정을) 뭐라고 말로 하라고 하면 말 못 하겠네요. 뭐라고, 어떻다고, ‘그냥 슬프다.’는 얘기도 아니구요. ‘그냥 섭섭하다.’ 이런 얘기도 아니고 뭐라고 말로 못 하겠네요. 그걸 ‘슬펐다’무슨 뭐‘섭섭했다.’이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네요. 참 뭐라고 해야 할 지. 참 그랬어요. 여러 날.”
단풍이 곱게 물든 시월 중순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운 오후. 전 천주교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78)는 법정 스님 입적을 바라본 느낌을 묻는 나그네들에게 말씀했다.

처음부터 벽이 없었으니 “그냥 제 개인 소견인지 모릅니다만, 천주교 측에서 볼 때 불교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무슨 교리나 관념 얘기가 아니고, 양쪽이다 수행이라는 걸 한단 말입니다. 재가자든지 출가자든. 또 예불뿐 아니라 기도를 하고, 양쪽이 다. 또 경經, 경전이 있고, 세속 인연을 끊고 버리고 떠나서 사는 공동생활이 있거든요. 그냥 삶 자체가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 차이를 먼저 떠올리는데, 이 어른 남다르다. 단지 다를 뿐인데도‘틀렸다!’고 하는 현실에서, 다름이 닮음과 한 뿌리라고 풀어놓는다.

“법정 스님이 신념을 가지고 가끔 말씀하셨어요. ‘문화·사회·역사를 봤을 때 종교목적이 종단 구성일 수는 없다’고. 그건 득도를 하기 위한 방편이지 목적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또 법정 스님은 ‘견성을 하면 그 순간 불자이길 그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신분으로 불자다. 이런 걸 뛰어넘어모든 종교가 참 삶을 찾아보자는, 궁극에 이르는 수단으로 애를 쓰는 거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지 않느냐?’며 아주 확신하셨어요. 저도 상당히 공감입니다.”
법정 스님이나 장익 주교, ‘이 어른들한테는 처음부터 벽이 없었다. 그저 자연스러운 행동이셨을 뿐인데 모자라는 중생들이‘종교 벽을 넘어서 어쩌고 하면서 호들갑을 떨어댔구나.’하는 생각에 낯이 달아올랐다.


“우리는 죽음을 당하는 일로 여기는데, 저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명을 다 내어주면 그게 곧 죽음’이죠. 삶의 완결, 완성이라고 할까요. 살다가 죽는 건 내 삶을‘다 하는 것’이죠.‘ 적극 나서서 맞아야 할 게 죽음’이에요. 그렇게 생각을 할 때 나 하나만 살려고 든다면 제대로 된 삶일 수 없고, 따라서 제대로 된 죽음이 될 수 없죠.”
삶을 다 한다는 말씀이 가슴에‘확’와 닿았다. 다한다는 말은 온 힘을 다 쏟는다는 말씀 아닌가. 말씀 그대로 있는 힘을 다 쏟아 부어 이룬 열매가 곧 죽음. 그러니 죽음은 완결이다. 그 완성을 절집에서는 열반이라 이른다.

“이월 하순인가? 병원에 가서 뵈었어요. 실내가 덥고 건조하니까, 법정 스님이‘이 집에 아이스크림 같은 건 없나?’그러셔. 허허. 스님은 뭐 벌써 다 놓고. 담담하시더라고요. 별로 깊은 얘기 나누지 않고, 하시는 말씀 몇 마디 듣기만 하다가 나오는데 손을 꽉 잡으세요. 뼈밖에 없는 양반이 어떻게 아귀심이 센지 깜짝 놀랐어요. ‘이 양반 오랫동안 장작 패던 실력이 남아서 기운이 센가?’그랬어요. 손을 꽉 쥐더니 안 놓으세요. ‘당신은 이제 작별이다. 아시는 거지.’ 그때가 마지막이었어요.”
법정 스님은 손을 꼭 쥐시고 무슨 말씀을 전하고 싶으셨을까? 평소에 하시던 말씀 그대로 당신은 ‘살 때 삶에 철저해 털끝만치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만큼, 죽음에 앞서 삶에 조금도 미련두지 않는다. 사는 것도 내 자신 일이고 죽음 또한 내 자신일. 철저히 살았으니, 철저히 죽는다.’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정성이 담긴 위대한 맹물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고. 우리 어머니들이 새벽, 동트기 직전에 일어나서 가장 처음 뜬 우물물, 용란(龍卵)이라고 부르는 정화수를 장독대에 올리고 빌 때, 그 바탕에 담긴 게‘정성’이었다며 시월 초 군인들과 나눴던 얘기를 꺼내면서, 종교 바탕에 지극한 정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지극함이 자꾸 사라지는 게 안타깝다는 말씀을 드렸다.“ 장병들에게, ‘우리가 나 잘났다고 설쳐대지만 이제까지 이렇게 온 것은 우리 어머니들 정성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 정성을 잃어버렸다. 올해가 초조대장경을 파기 시작한 지 꼭 천 년이 되는 해인데, 우리 선조들이 대장경을 팔 때 한자 파고 향 사르고 세 번 절하고, 또 한자 파고 향 사르고 세 번 절하고 또 팠던 것처럼 정성스러운 삶을 살아보자. 불공이란 게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얘기를했습니다.”

“정화수 말씀을 하셨는데, 엄밀히 말하면 맹물이거든요. 그러니까 무슨 값지고 희귀한 걸 신령 앞에 바치는 게 아니고 그야말로 맹물이거든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더할 나위 없이 가난하고 순수한. 그거 한 사발 떠놓고 빌고, 그거 한 사발 떠다 놓고 혼례를 올리고, 인생을 서로 약속하는 위대한 거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해왔어요. 초조대장경 말씀도 하시는데 인류사에 정말 위대한 예술작품, 작품뿐이 아니고, 노래고 글이고 춤이고 종교성을 띠지 않은 게 없어요. 원시시대서부터. 나보다 더 큰 거를, 내 나름으로 정성을 다해서 겸허하게 있는 힘을 다해서 있는 데까지 해보고‘나는 사라져도 좋아. 내가 감히 해도 되나?’하는 마음으로, 굉장히 겸허한 마음으로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난 날 위대한 작품들은 이름이 없어요. 드뭅니다. 누가 한 게 중요한 게 아니었었어요. 한다는 게 중요했지. 아까 말씀한 정성이라는 속에도 그런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았을까요?”

평소에 신도들한테 무슨 얘기를 하시느냐고 여쭸더니 “뭐 다른 거 없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그 말씀이죠. 뭐.”하고 간단한 말씀이 돌아온다. 그래도 그 가운데 특히 강조하시는 말씀 한 마디만 해달라고 떼를 썼더니.
“글쎄요. 특별히 한 거라고 없고요. 전 언제 말이 모자라서 세상이 안 돌아간 적은 없다고 생각해요. 삶이 모자라서 그런 거지. 말이 모자라서 세상이 안 돌아가고 삶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살아내질 않아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근데 살아낸다는 것도 제 힘으로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법정 스님도 가끔 그런 글 쓰셨지만, 내가 밥술 떠도 벌써 거기에 생각도 못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땀과 정성이 서려있고, 우리 혼자서 그걸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볼 때 진실 되게 살아낸다는 것은 혼자 힘으로 하는 게 아니고, 일체를 이루는 공동체로서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복음서를 다 읽어 봐도 예수님이 당신 좋자고 한 거 하나도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남을 위해서, 남이 아니라 남으로 여기질 않았죠.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다 내주신 거지. 나한테 뭐 돌아오라고 한 거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네 잘못까지도 내 잘못으로 여길게. 아픔이나 죄과까지 내가 다 뒤집어쓸게.’하셨단 말입니다. 나만 살겠다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사는 거지. 뭐 다른 거 있습니까?”


뵈러 가기 전 장익 주교 스승인 카를 라너(Karl Rahner, 1904~1984)가 지은 <일상>과 주교님이 직접 엮은 <폭력>을 읽었다. <일상>은 50쪽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이지만 일하고, 걷고, 앉고, 보고, 웃고, 먹고, 자는 그야말로 일상에 담긴 뜻을 성찰한 책이다. 한 꼭지 살펴보면“…우리 일상 경험 영역에서 식사보다 신비로운 일은 아마 없으리라. 그것은 죽은 것이 산 것으로 화함이요. 어떤 존재물을 그 본성을 지킨 채, 더 차원 높고 더 넓은 다른 현실 안으로 포섭함이다.”<일상> 못지않게 얄따란 책 <폭력>을 읽기 전‘대체 왜 폭력을 다루셨을까?’ 의아스러웠는데, 읽어 내려가면서 폭력이 지닌 실체를 바로 보게 하기 위해서 정리를 하셨구나 하는 걸 알았다고 말씀드렸더니.
“아, 폭력도 보셨어요? 전통(전두환 정권) 말기였어요. 힘으로만 뭘 하는 게 아닌데 싶어 도대체 폭력이 어떻게 된 건가? 하고 그동안 여기저기서 봤던 것들을 모아 엮어냈습니다. ‘폭력이라는 게 꼭 거짓하고 같이 다녀요.’열려있고 진실하다면 폭력을 휘두를 일이 없습니다. 그때 참 긴장된 시대 아닙니까? ‘집권자뿐이 아니라 국민들도 일단 강해야 한다.’(여겼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죠. 나라고, 민족이고, 개인이고 강해야 뭐가 된다는 게 상당히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어요. 저는 그게 늘 마음에걸립니다. 이게 꼭 길인가? 큰 의문입니다.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데. 저는.”
말씀에서 허허로움이 느껴진다. 얇은 책 두 권이 아주 큰 울림이었다고 말씀드리니.
“남들 훌륭한 말씀을 제가 이렇게 긁적긁적 옮긴 거지. 제 생각도 아닌데.”라고 말씀하면서 책을 한보따리 건네주신다. 그 가운데 나그네는 주교께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 러끌레르끄님이 쓴 책 <게으름의 찬양>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한 꼭지 살짝 엿보면.
“우리 삶이 제대로 사람다우려면 -마냥 한가롭기만 해야 할 것은 없지만- 거기에는 느림이 있어야 합니다. 하기야 일을 찬양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이나 힘씀은 역시 쉼에서 비롯되고 쉼에서 그쳐야 하는 법이고, 위대한 업적이나 크나큰 기쁨은 뛰면서는 이루어질 수도 음미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주에 경주를 거듭한다는 것은 산에 산을 포개쌓는 게 아니라 바람에 바람을 포개는 꼴이 됩니다.”


네 세상 어디쯤 있느냐 당신이 펴낸 책 가운데 법정 스님이 가장 마 음에 들어 했다는 <하씨딤 가르침에 따른 인간의 길>은 19세기 중엽 동유럽에서 일어난 신비주의 색채가 짙은 종교운동 공동체인 ‘하씨딤’ 가르침을 정리한 책이다. 책 첫머리 ‘마음 살핌’에 나오는 ‘하씨딤’소속이었던 북부 백러시아 랍비 ‘슈뇌르 살만’옹이 반대파인 ‘밋낙딤’사람들 무고로 옥살이를 할 때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감옥 안에서 묵상에 잠겨있는 살만옹에게 간수장이 묻는다. “성서를 보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담에게‘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하고.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면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 찾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는 말이다. 이에 대해 랍비는 “하느님은 사람 하나하나에게 네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 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고 답한다.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준엄한 말씀이다. “네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 와 있느냐!”법정 스님이 법석에서 곧잘 인용하셨던 말씀이다.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내 세상 어디쯤 서 있을까?

친구는 내 부름에 대한 응답 법정 스님과 장익 주교, 언제 어떻게 만났을까? 70년 대 초 역경원에서 경을 번역 일을 하던 법정 스님은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렀다. 그즈음 처음 만났는데 딱히 첫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며, 법정 스님이 다래헌에 오셨다는 기별이 있으면 가 뵙기도 하고, 안 계셔서 헛걸음도 치고, 기다렸다 뵙기도 했다며 40년 전 일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저희는 뭐 만나서 거창한 얘기 한 게 없고요. 그냥 차나 마시면서 서로 편안한 얘기를 나눴어요. 아주 편했어요. 처음부터. 제 편에서만 그랬는가? 몰라도 처음부터 오래 사귀었던 분처럼 아주 편했어요. 서로 그렇게 편했어요.”
‘이심전심以心傳心’, 저 유명한 카알라일과 에머슨도 처음 만나 삼십분 가량을 아무 말 않고 앉았다가 헤어지고는 재밌게 놀았다고 했다는데. 그저 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법정 스님과 장익 주교. 이 두 어른, 40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넌지시 서로 바라보던 순정純正한 사이다.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는 법정 스님 말씀처럼.
‘겸양지덕謙讓之德’, 태산 같은 포부를 갖고 누운 풀처럼 낮추라고 했던가. 법정 스님이 어디에도 걸림 없는 바람 같다면, 장익 주교 이 어른, 달을 품어도 흔적 없는 호수처럼 넉넉하게 대상을 받아들이는 조선백자 ‘달항아리’같다.
글=법정 스님 자취를 더듬는 변택주,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쟁이 이종승 |
2011-01-12 오후 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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