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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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으로 한마음 이뤘다
1011년 첫 착수 후 중국ㆍ일본 대장경의 저본 돼

고려는 거란과 몽골의 침입에 불법의 힘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장경>을 간행한다. 부처님이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호국을 위해 왕실과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을 매개체가 필요했다. <편집자 주>


나라를 구하는 마음으로 조판

왕실 주도로 불교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던 고려는 제8대 임금인 현종(1009~1031) 원년에 거란의 침입을 받자 전쟁에서 나라의 구심점을 삼기 위해 대장경을 제작한다. 불보살의 위신력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며 이 때 제작한 것이 <초조대장경>이다.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대반야경(大般若經)>(600권) <화엄경(華嚴經)> <금광명경(金光名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의 조성을 시작했다.

전쟁 끝에 거란이 물러가고 1106부 5148권 규모의 대장경판이 완성됐다. 이렇게 완성된 초조대장경은 성종 10년(991년) 한언공(韓彦恭)이 송나라(宋)에서 들여온 480질(帙) 5047권에 달하는 개보판(開寶板)을 토대로 완성한 것이다.
고려는 신라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거란의 대장경까지 참고해 <초조대장경을>제작했다. 당시 한역(漢譯) 대장경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이었다.

고려는 제23대 고종 임금(1213~1259) 19년인 1232년에 또 다시 몽골의 침입을 받는다. 몽골은 전세를 유리하게 만들고자 고려 호국 의지의 상징인 장경판을 태워 버린다.
고려는 다시 불법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고려대장경>을 조판하게 된다. 이때 조성된 대장경은 대장경을 다시 조판했다는 의미에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불린다. <고려대장경>은 8만여 판수와 8만 4000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000 법문을 실었다는 뜻에서 흔히 ‘8만 대장경’으로 불린다.

고려는 <고려대장경> 조판을 위해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작에 나섰다. 준비부터 조성까지는 16년이 걸렸다. 전국의 학자와 기술자를 동원해 자료를 수집한 고려는 진주에 대장도감 분사를 두고 모든 국력을 동원해 고려대장경 을 조판했다.

<고려대장경>은 8만1258판을 양면으로 새겼으므로 16만 2516면이 된다. 1512부 6791권의 경전을 수록했다. 경판의 가로 길이는 마구리까지 68~78cm, 세로길이는 24cm, 두께는 2.8cm, 무게는 3.4kg에 달한다. 완성된 <고려대장경>은 당초 강화도에 보관됐으나 왜적들의 침략이 심해지자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 후 조선 태조 때(1398년) 해인사장경각에 보관된다.

하늘도 감탄한 정성과 정확성

<고려대장경>은 제작에 있어서 많은 정성과 한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았다. 30여 전문가들이 각종 이판들과 대교면서 정밀한 교정 작업을 거쳤다. 글자를 한 자 새길 때마다 절을 했다고 하니 요즘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새겼지만 마치 한 사람이 제작한 것처럼 일정하고도 아름다운 형태의 필체(구양순체)를 유지하고 있다.

<고려대장경>은 수기 스님이 대장경 내용과 판각을 총 지휘했고, 100~200명 정도의 사경승(절에서 불경을 옮겨 쓰는 스님)들이 직접 글씨를 써서 판하본(판에 붙여서 인쇄할 내용을 쓴 종이)을 제작했다. 이를 다시 수기 스님과 불교 경전에 밝았던 학자 스님들이 모여서 경전 내용의 오류를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경판을 새길 나무는 나무질이 일정하고 나무의 조직이 고른 것을 골라 가을에서 이른 봄 사이에 베어 냈다. 아름드리 나무를 90cm 정도의 길이로 잘라, 1년 이상 묵혀서 진을 뺐다. 베어낸 나무를 바로 사용하면 갈라지고 휘기 때문이다. <고려대장경> 제작을 위해 나무를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근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나무를 소금물에 삶았다. 글자를 새기기 쉽고 보관도 잘 되기 때문이었다.

<고려대장경> 4톤 트럭 70대 분량으로 운반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 당시 운반은 육로 이동설과 해로 이동설이 제기된다.
해인사 대적광전에는 대장경판을 운반하는 모습을 담은 벽화가 있다. 이 벽화에는 운반 행렬 맨 앞에 동자가 향로를 들고 걷고 있고, 그 뒤를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행렬을 이끈다. 스님 뒤에는 경판을 소달구지나 지게에 싣고, 머리에 이기도 하면서 대장경판을 운반하는 사람들이 뒤따른다.

강화도를 떠나 한강에 도착한 배는 다시 남한강을 거쳐 충주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는 해인사의 벽화에서처럼 많은 인력이 동원돼 육로로 이동됐다. 행렬이 낙동강변에 이르면 대장경을 다시 배에 옮겨 싣고 고령까지 이동했고 다시 육로로 해인사에 들어갔을 것이다.

태조 7년 5월 12일 실록을 살펴보면 “임금이 서강에 행차해 전라 조운선을 시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대장경판이 서울에 도착한지 이틀 뒤의 기록으로 조운선이란 조세로 거둔 쌀을 운반하던 선박이다. 조운선은 깊이가 얕은 강을 따라 내륙으로 이동하기 쉬웠고, 해변을 항해하기에 유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 배에는 1척 당 경판 5000장을 실을 수 있어, 20척 정도만 있으면 팔만대장경을 운반하는데 충분했다. 기록에 나타난 조운선은 이틀 전 서울에 도착한 팔만대장경의 운송수단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은 열반에 임한 뒤 자신이 설법한 법과 계율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부처님이 사라진 상황에서 승가의 안정과 새로운 결속이 필요해진 불교는 불전(佛典)의 결집(結集)을 추진하게 된다. 고려가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의 마음의 구심점을 바로 세우기 위해 두 번에 걸쳐 고려대장경 조판을 시행한 것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불전결집’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고자 한 마음과 다를 바 없다.

외국의 대장경 사례들

인도 <팔리삼장>
<팔리삼장>은 팔리어로 작성된 불교 성전의 총칭이다. 삼장(三藏)이란 경(經), 율(律), 논(論)의 셋을 간직해 담고 있는 광주리라는 의미이다. 팔리어는 원래 서인도의 언어였던 것이 부처님 열반 후 초기교단이 서인도로 확대됨에 따라 성전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촉판대장경>
송태조 971년에 장종신(張從信)에게 황제의 명령으로 사천성의 성도에서 판목(版木)을 새긴 것이 중국 최초의 대장경이다. 10년 이상 걸려 983년에 13만 매의 판목이 완성됐는데, 이를 <북송판대장경> 또는 송본(宋本), 성도의 옛 이름을 따서 <촉판대장경(蜀版大藏經)>,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관판대장경(官版大藏經)> 이라고 부른다. 이후 중국에서는 <금장대장경(金藏大藏經)>, <원장대장경(元藏大藏經)>, <명장대장경(明藏大藏經)>, <청장대장경(淸藏大藏經)>등 활발한 대장경 편찬이 이루어졌다.

티베트 <티베트 대장경>
티베트에서는 7세기 중엽부터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 8세기 말엽에는 불경번역이 대장경으로서의 집성 형태로 이루어졌다. 13세기 무렵에는 처음 목판 인쇄가 되고(날탄古版), 14세기에는 주요한 현교(顯敎)와 밀교의 불경 번역이 거의 완료돼 18세기 무렵에는 완결판이 나왔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불교를 중심으로 불교와 관련된 논리, 심리, 윤리, 의학, 공예, 언어 등 여러 학문을 망라하고 있다는 점이다. 산스크리트 원전의 대부분이 유실된 오늘날, 티베트 대장경은 불교 연구의 기초자료로서 중요하게 평가된다.

일본 <대정 신수대장경>
일본에서 활자를 이용한 최초의 대장경은 메이지 시대(1880~85)에 간행된 <대일본교정축쇄대장경(大日本校訂縮刷大藏經)>이다. 이 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을 토대로 중국과 일본의 불전으로 증보해 1916부 8534권을 수록하고 있다. <고려대장경>은 조선 초기 일본의 요청으로 대량 수출했다. 일본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받아들인 이후 대장경 연구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20세기 초 활자판으로 간행된 <대정신수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을 저본(底本)으로 삼으면서도 독자적인 분류로 불전을 배열했다. 그리고 송, 원, 명의 중국 대장경과 일본에 소장된 사본들을 함께 대조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성경 보급 가도
성경 보급에 큰 영향을 끼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는 1454년 요한 구텐베르그가 발명한 인쇄기이다. 인쇄기의 발명과 함께 세계최초로 인쇄한 것이 라틴어 성경이었다.
초기 성경은 파피루스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인쇄술이 발달하고 1517년 종교개혁 때 개혁자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강조하자 성경의 인쇄와 보급은 가속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성경사본들을 비교 연구한 끝에 세계 최초로 1516년에 헬라어와 라틴어의 대조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이후 성경은 독일어, 영어, 불어로 각각 번역되고, 개혁자들 주도로 스페인어, 이태리어, 화란어 등 각 나라 말로 계속 번역된다.
박기범 기자 | smile2@hanmail.net
2011-01-07 오후 10: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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