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 오후5시. 평화재단 이사장 법륜 스님과 인터뷰를 마치고 이사장 사무실을 나오는 순간, 평화재단 직원들이 헐레벌떡 스님에게 속보를 전했다. 스님은 평정을 유지했다.‘평화’를 주제로 1시간 반가량 이어진 인터뷰 내용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폭탄은 터지고, 민간인이 죽었다. 과연 무엇이 평화이고 평화를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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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란?
갈등이 없는 것, 조화로운 것이다. 평화는 아무것 문제도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문제가 생겨난다. 이런 갈등 속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평화다.
평화를 위해서는?
-평화를 위해서는 첫째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것, 둘째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는 것이 평화로 가는 길이다. 예를 들면 북한 핵개발에 대해서 남한은 개발을 하면 안 된다는 입장이고, 북한은 개발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자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옳다 거나,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 문제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제건, 종단 내부의 문제건 그것을 지혜롭게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입장에서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 가야한다. 그럴 때 평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북한 3대 세습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반대이다.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 질 수는 없다.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더라도 통일을 위해서는 그런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하려면 그것을 인정하고 출발해야 한다. 아니면 통일을 포기하던지.
통일이 곧 평화인가?
-남북의 궁극적 평화, 완전한 평화는 통일이다. 통일 이후에는 우리 내부적 갈등이 있을 뿐이지 남?북의 갈등은 아니다. 또 한국과 중국의 갈등이 있을 뿐이지 남?북간의 갈등은 없다. 그렇다고 남과 북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평화가 도래하지 않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통일이 되기 전에도 남한은 북한에 대해, 북한은 남한에 대해 서로 다른 체제를 인정하고 그것을 서로 이해하면 남?북간에 평화는 유지된다.
전쟁에 대해서 무뎌진 것 같기도 하다.
-늑대소년과 같은 것이다. 마약도 계속하면 마약효과가 떨어지고, 음식도 같은 것을 계속 먹으면 맛이 떨어지듯. 전쟁의 위기감이 계속되면 위기의식의 무뎌진다. 일종의 피로감이다. 북한 주민의 굶주림도 10년 이상 지속되니 지금은 굶어 죽는다고 해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직도 그 소리인가”하고 만다.
전쟁은 절대 허용할 수 없는가?
-전쟁은 안하는 것이 좋다. 지금 전쟁이 나면 6?25 전쟁보다 피해가 더 클 것 아닌가. 앞으로 또 60년 100년을 전쟁의 상처를 가지고 산다면 우리에게 미래의 희망은 없다. 하지만 절대로 안 된다고는 할 수 없다. 일어 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막아야 한다.
해결할 위치에 있다면 남북문제는?
-평화적 통일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북한의 내부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거기에 대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은 중국에 의존할 우려가 있다. 우선 굶주리는 일반 주민에게는 먹을 것을 충분히 줘야 하고, 중간 간부에게는 질 좋은 남쪽 물건을 지원해 주어서 한국제가 좋다고 생각하도록 하고, 최상층 간부에는 신분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일정기간의 체제에 대한 보증이 필요하다. 당장 급한 것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는 종전 선언을 멀리하고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
지금 세계는 규모경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지역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도 우선 규모를 더 키워야한다. 그래서 1단계 작업이 통일이다. 2단계는 통일된 한국이 일본과 경제 공동체 구성, 3단계는 중국과의 협력이다. 현 상태에서 남한이 중국과 협력을 한다면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서 독자성도 국가의 비전도 없어진다.
민족의 비전을 만들고자 하면 최고의 국가 목표를 통일로 잡아야 한다. 통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여 북한주민의 민심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통일?외교를 해야 한다. 이런 국가목표가 없으니까 우왕좌왕하는 것이 아닌가. 인도적 지원은 통일을 향한 최고의 민심 얻기 정책이고 외교정책이다.
북한의 위협과 남한정책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실망한 적은 없는가.
-실망한 적은 없다. 다만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을 보면 좀 답답하다. 그래서 더욱 노력해야 한다. 이 세상은 항상 난국이다. 세상이 어디 내 뜻대로 되는가. 풀기가 어려우니까 우리의 과제로 남아있는 것 아니겠는가. 더 연구해서 답을 찾으면 되는 거다. 상대가 잘했나 잘못했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통일의 꿈을 달성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요즘은 정부의 정책변화에 별 기대를 안 한다. 전에는 이명박 정부와 오바마 정부에 북한 핵문제 해결방안과, 통일정책안도 내보고 했는데 3년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곧 발등에 불이 떨어져 허둥 될 것이다. 지금은 다른 대안을 찾고 있다.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풀어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대통령을 찾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람직한 대북 지원은
-급한 인도적 지원은 조건 없이 해야 하고, 자생력을 키워주는 개발지원은 북한의 제도적인 변화를 요구하면서 지원해야한다. 우선 굶어 죽는 것은 도와줘 죽음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전 정권은 지원해주는 것만 했지 북한 제도의 변화는 요구 하지 않았다. 현 정권은 제도의 변화만 요구하고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는다. 둘 다 모순이다.
평화재단은
-통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평화재단을 만들게 됐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격히 바뀌고 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으로 동아시아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한국은 미국 쪽으로, 북한은 중국 쪽으로 기울어져 분단이 영속화될 위험이 있다. 이것을 막으려면 중국이 북한에 개입하기 전에 남북협력을 강화시키고, 북ㆍ미간에 타협을 성사시켜 통일로 가야 한다.
심포지엄, 세미나, 리더십아카데미, 월례강연회 등에 초청되는 강사 섭외가 눈에 띈다.
-과거 경력이 좌파냐 우파냐는 것은 보지 않는다. 그 분야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를 선택한다. 극좌나 극우는 빼고 중도 보수나 중도 진보의 선에서 균형을 이룬다. 강사초청의 방법은 선택이 되면 다방면으로 교섭을 해서 모시게 한다.
통일의병을 모은다는 취지로 평화재단을 설립했다. 요즘은 대부분 윤여준 원장이나 조민 부원장, 조성렬 부원장이 직접 한다. 강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평화재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다는 차원에서 오셔서 강의한다. 평화재단이 좋은 일을 한다는 신뢰감이 있다.
지난 6년을 진단한다면
-열심히 했지만 목표한 바를 성취하지 못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한반도의 통일에 심각한 장애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을 풀어내고자 출발했다. 하지만 평화재단이 재 역할을 하기도 전에 중국의 급격한 부상으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빠르게 표면화 됐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으로의 방향
-평화연구원은 평화와 통일에 대한 정책을 생산하고, 교육원은 민족적 리더십을 키우는 일을 할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일반인 가운데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발굴해서 평화와 통일의 일꾼으로 키우고자 한다. 일부는 대중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해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정부의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니까 우리가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갈등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가 세상을 연기적으로 보지 않고 개별적 존재의 집합으로 보고 있다. 이 세계는 상호 개별적 존재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연관돼 있다. 개별적 존재의 집합이라고 볼 때는 승리하는 것이 성공이다. 그러나 연기적 존재임을 알면 상대를 해친 것은 곧 나를 해친 것이다. 그러므로 승리가 아니라 조화와 균형을 통해서 함께 행복해지는 것으로 성공을 삼는다. 그런데 이겨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늘 대립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자와 불교계의 자세는?
-불자라면 자기 수행을 통해 자유와 행복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이 좋은 법을 확산시키는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다수의 불자들이 기도라는 미명하에 노력 없이 늘 공짜만 바란다. 붓다는 공짜로 무엇을 주는 분이 아니라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지혜로운 분이시다.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와 평화에 대해
-종교의 가르침은 세상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풀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절대화하면서 상대 종교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해 갈등과 분쟁이 일어난다. 나와 다른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자세를 놓치면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은 말이 불교인이고, 기독교인이지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 불교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얼마나 충실한지 점검해 봐야한다.
포용성, 이해, 인정이 있어야 평화가 온다. 북한이든 기독교이든 종단간의 관계에서든 마찬가지다. 우리가 한번 갔으니, 너희도 한번 오라는 것이 평등은 아니다. 어른과 아이가 똑같은 양을 먹는 것이 평등인가.
최종 목적은
-개인은 자유와 행복. 즉 해탈과 열반이다. 그렇게 하려면 첫째 열심히 수행해야한다. 그렇다고 수행만하면 다 된다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 나서 폭탄 맞으면 수행자도 죽는다. 또 환경오염이 되고 기후변화가 일어나면 수행자도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평화를 지키고, 환경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남을 위한 것 같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다. 이것을 ‘상구보리 하화중생 (上求菩利 下化衆生)’이라고 하고 ‘자리이타 (自利利他)’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