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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1544~1610)가 열반한 지 올해로 400년째다.
사명대사는 전쟁의 종결을 위해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3차례 회담하고 또 전쟁 후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조선인 송환을 이끄는 등 외교 전략가로서 큰 역할을 했다.
사명성사 추모대제 봉행위원회는 10월 4일 국회 헌정기념관 2층 대강당에서 ‘사명성사 열반 400주기 제1차 추모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사명성사의 삶과 구국애민 정신을 재조명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배광식 서울대 치대 교수가 ‘사명성사의 수행자적 면모와 그 의미’를 주제로,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국가지도자로서 사명성사의 위상과 그 현재적 의미’를 주제로, 김승호 동국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국가지도자로서 사명성사의 위상과 그 현재적 의미’를 주제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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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광식 교수는 주제발표에서 “사명성사의 전투와 축성에서 보여준 지도력, 서생포 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수차례 가진 담판 및 일본탐적사에서 보여준 외교적 능력 등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며 “하지만 억불숭유의 여건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명맥을 잇고 중흥시킨 수행자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배광식 교수는 사명대사의 수행 일대기를 살피며 그의 수행자적 면모를 조명했다.
유년시절 유학을 배운 사명대사는 학문을 배우고자 13세에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대사를 찾아가 전등록을 읽고 선의 이치를 깨닫는다. 사명대사는 17세에 신묵대사에게 득도한 뒤 18세(1561년)에 봉은사에서 선과(禪科)에 합격했다.
이후 사명대사는 직지사 주지(1573년)로 가기까지 15년간 봉은사에 주석하며 부지런히 수행했고, 틈틈이 사림과도 교류하며 4자(四子)를 배웠으며, 그 후 선종 수사찰인 봉은사 주지를 사양한 뒤 서산대사에게 법제자로 들어갔다(1575년).
배광식 교수는 “이후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발발시(1592년)까지 15여 년 동안 서산대사가 쓴 ‘선교결’과 몇 개의 게송이나 서(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가장 수승한 휴정의 법사(法嗣)로서, 임제선을 표방한 조계종 전통의 선사로 수선안거(修禪安居)와 유행(遊行)을 하는 등 30여 년간 수행생활에 진력했다”며 “전란과 전후에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은 흔적이 여러 곳에 보인다”고 설명했다.
배 교수에 따르면 사명대사는 통불교를 지향한 조계종풍대로, 당대의 제일 종장인 서산대사의 법제자가 돼 임제선을 근간으로 수행하면서도, 교학에도 밝았고, 정토도 아울렀다.
배 교수는 “배불숭유(排佛崇儒)로 어려움에 처한 조선불교역사의 중심에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해박한 유학지식을 가지고 사림과 교유(交遊)하며 불교 현창(顯彰)에 진력했다”며 “무엇보다 저자에 뛰어들어 제민제중(濟民濟衆)의 보살행을 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밀양 표충사(주지 재경)는 10월 9~10일 ‘나라 구하기 사명성사(四溟聖師) 열반 400주기 추모대제’를 여는 등 사명대사 재조명 작업을 본격화한다. 조계종 총무원장이 추모대제 봉행위원장을 맡고 26교구 본사 주지 스님들이 봉행위원으로 참여하는 종단 차원의 대규모 행사다.
행사 9일에는 표충사 경내에서 사명성사 백일장이 열리고, 저녁에는 가수 태진아 현철 현숙 다비치 등이 출연하는 자비음악회도 개최된다. 둘째 날인 10일에는 추모제와 함께 성균관유도회총본부가 주관하는 다례제가 열리며 불교식 추모법회와 영산재 등이 함께 진행된다.
#사명대사(1544~1610)
사명대사는 18세(1561년)에 승과에 응시해 봉은사에서 선과(禪科)에 합격했다. 사명대사는 32세(1575년)에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기도 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같은 해에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주석하던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의 문하에 들어가 법제자가 돼 3여 년 모시고 수행을 하였다. 그 후 운수행각 끝에 43세(1586년)에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悟道)했고, 퇴락한 오대산 월정사를 중수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일으켜 평양성 탈환에 수훈을 세우는 등 승병대장으로서 7년 전쟁을 치르며,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으로 여러 번 들어가 회담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보배가 무엇이냐고 묻자, 가토 기요마사의 목이 조선의 보배라고 말해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때 사명성사는 일본으로부터 재침을 하지 않겠다는 약조, 조선왕조의 능침을 훼손한 병사의 조선 이첩, 3000여 명의 피로(被擄) 송환 등의 업적을 이루어냈고, 이후 300여 년간 조일교린(朝日交隣)의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