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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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곡 속 지지 않은 조선 왕녀의 불심
한국불교미술사硏, ‘청룡사의 역사와 문화’ 발간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청룡사에는 영조 임금이 친필로 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이라는 비각과 비석, 현판이 있다. 정업원은 궁궐 안에 있던 법당이다. 왕비나 공주 상궁 등이 궁궐 밖으로 함부로 나올 수 없어서 궁궐에 법당을 지어놓고 기도하던 곳이다. 4대문 밖의 청룡사가 ‘정업원’이란 궁궐 내 법당의 이름을 갖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조 비운의 임금 중 하나였던 단종 임금의 비가 정순왕후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의 복위를 시도했던 사육신 사건(1456년) 이후 동대문 밖으로 쫓겨나 청룡사의 비구니(허경 스님)가 됐다.

허경 스님은 매일 청룡사 위 동망봉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며 영월로 유배간 단종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다. 정순왕비 허경 스님을 동정한 도성의 부녀자들은 푸성귀를 사서 스님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 행렬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긴 행렬을 이뤘다.

이에 왕실이 푸성귀 공양을 금하자, 부녀자들은 청룡사 인근에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을 열어 팔고 남은 채소를 몰래 시주했다. 이 시장이 바로 동묘 남쪽 채소난전으로 일명 여인시장으로 불렸다.

청룡사에는 ‘자주동천’이라는 샘물이 있었다. 생활이 어려웠던 스님은 옷감을 받아와 이 샘물에서 자주빛이 나는 약초인 쭈치를 캐어 물들여 생계를 꾸렸다. 물들인 옷감이 바위에 널려진 청룡사를 두고 사람들은 ‘자주동절’이라고도 불렀다.

동망봉에 올라 단종을 그리워하던 허경 스님에게 시녀가 돌아갈 시간을 아뢰면, 스님은 “게 있게(거기 그대로 있게)”라고 말했다. 시녀는 ‘게있게 보살’로 불렸고, 그림으로도 그려졌다. 스님의 재를 지낼 때 걸렸던 ‘게있게보살’의 영정은 지금은 불타서 남아있지 않다.

허경 스님은 숙종 24년(1698)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다시 복위돼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도 사릉 받았다.

이후 영조 임금은 숙종 때 복위된 정순왕후 허경 스님의 한 많은 일생을 소상히 들었다. 영조는 정순왕후 허경 스님의 갸륵한 일생을 기리는 뜻에서 청룡사를 옛 왕실 후궁출신 비구니들의 사찰인 정업원으로 존칭하게 했다. 그리고는 손수 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어필을 내렸다.

한국불교미술사연구소(소장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최근 청룡사의 역사와 성보문화재 등을 총망라한 <청룡사의 역사와 문화>를 출간했다.

책에는 청룡사의 역사자료 뿐만 아니라 석삼불상, 명부전 석지장시왕상, 삼신불괘불도 등 불상, 불화, 불구, 건축 등 문화재에 관한 모든 것이 수록됐다.

한국불교미술사연구소 문명대 소장은 “청룡사는 비구니절로 세워져 비구니절로 계승돼 온 비구니사찰의 산 역사”라며 “청룡사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 불교의 한 축을 이루는 비구니 역사를 조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02)3673-3426

조동섭 기자 | cetana@gmail.com
2010-09-20 오후 12: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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