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부터 1939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무영탑>은 작가인 현진건이 동아일보 재직시(사회부장) 이른바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1년간의 옥살이 후에 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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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연못 위에 떠있던 청운교 백운교가 지나간 소나기에 젖어있고, 자하문 지붕 너머에는 다보탑의 윗토막이 구름에 흘러가고 있다.
다보탑을 다 짓고 난 아사달은 석가탑을 짓고 있었다. 부여를 떠나온 지 3년 째 되던 초파일 밤. 아사달은 고요하게 쏟아지는 달빛 아래서 다보탑을 돈다. 부여를 떠나기 전날 밤, 그 자그마한 가슴으로 꿀꺽꿀꺽 돌아누워 울던 아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떠나던 날 멀리서 불렀던 이름, 아사녀. 그 이름이 사무쳐 탑을 돌고 또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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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불국사는 528년(신라 법흥왕 15)에 세워졌다는 설과 이보다 앞선 눌지왕 때 세워졌다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가람이 많이 소실됐고, 40여 차례의 중수와 일제강점기의 대규모 개수, 1969년 구성된 불국사 복원위원회의 불사를 거쳐 오늘의 이르고 있다.
“여기가 분명히 불국사입지요?”
불국사의 저녁나절. 웬 여자 거지 하나가 절문 앞에 나타난다. 아사녀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 서라벌에 온 것이다.
“무슨 소관이 있어 불국사를 찾으시오?”
“이 절에 부여에서 온 석수가 있습지요? 아사달이라고. 그 어른이 제 남편이요.”
“안 되오. 그 석수는 지금 볼 수 없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왔담. 절간에 아무 여편네나 함부로 들이는 줄 아나 봐.”
석가탑이 다 지어지기 전에는 아사달을 만날 수 없다는 문지기의 말에 아사녀는 절망한다.
“제가 어디서 그 탑이 다 되고 안 된 것을 보고 온단 말씀에요. 온, 그 탑 그림자라도 보아야 알 것 아녜요.”
“여보 아주먼네, 그러면 좋은 수가 있소. 여기서 훤하게 내다보이는 저 길로 한 10리만 가면 거기 그림자못(영지ㆍ影池)이란 어마어마하게 큰 못이 있소. 그 못에는 이 세상 어느 물건치고 아니 비치는 게 없단 말이오. 지금 아사달이 짓는 석가탑 그림자도 뚜렷이 비칠 거란 말이거든. 자, 그 연못에 가서 기다려보오.”
끝내 석가탑의 그림자는 영지에 비치지 않는다. 하여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한다.
불국사 뜰에는 아사녀가 그림자도 보지 못했던 석가탑이 노을에 젖고 있었다. 석가탑이 완성되던 날 아사녀는 영지에 몸을 던진다.
“나는 가요, 저 물 속으로. 내 시신 위에나마 당신이 이룩한 석가탑의 그림자를 비춰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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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왜동읍, 영지 위로 바람이 불고 있었고,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이 물결에 흘러가고 있었다. 석가탑이 완성되고 난 다음 날 아침, 아사달은 죽은 아사녀를 찾아 영지를 헤매다 끝내 아사녀를 찾지 못하고 돌덩이에 아사녀를 새긴다.
‘그 먼 길에 나를 찾아오느라고 그 파리해진 얼굴을, 그 저는 다리를 보여주지 않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 그렇게 의젓한 그였거늘, 그렇게 차근차근하였거늘, 그렇게 나이보다 숙성한 그였거늘, 얌전한 그였거늘, 사랑 많은 그였거늘 나를 버리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 아사달은 허리춤에 꽂았던 마치와 정을 빼어 들었다. 그는 방장 나타난 제 아내의 환영을 그대로 그 돌에 새기기 시작하였다.’ 영지 옆에 있는 석불좌상이 그것이라고 전해온다.
불국사에 간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갈 일이다. 사랑이 바쳐진 공든 탑이 있기 때문이다. [인용문-무영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