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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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으로 사회갈등 해소를”
조계종 화쟁위, 화쟁사상 조명 워크숍

갈등 해법으로 주목 받고 있는 화쟁 사상을 조명해 사회적으로 생소한 화쟁의 의미를 짚어보고 이를 실천적으로 계승하자는 행사가 열렸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위원장 도법)은 8월 17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화쟁사상과 사회갈등 해소’를 주제로 워크숍을 개최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격려사를 통해 “지난 6월 화쟁위원회 출범은 우리 사회의 분열과 대립, 갈등을 불교의 화쟁사상에 입각해 풀어내고 상생의 길을 모색하자는 종단의 원력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며 “화쟁위원회 활동이 반석에 올라설 수 있도록 모든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부처님 자비사회가 실현될 수 있도록 종단의 모든 지혜와 열정을 쏟아붓겠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은 인사말에서 “화쟁을 하려면 새로운 눈,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며 “이번 워크숍은 화쟁위의 그간 활동을 돌아보고 숨을 한번 고르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워크숍은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화쟁-원융무애의 실천적 원리’를, 이도흠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사회갈등 해소, 화쟁이 대안이다’를 주제발표하는 특강 형식으로 진행됐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가 화쟁의 시작
몇 사람의 장님이 코끼리를 묘사했다. 코를 만진 어떤 이는 “코끼리는 길다”고 말했다. 배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벽과 같다”고 표현했다. 다리를 만진 이는 “기둥과 같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이런 장님들의 언급에 대해 원효 스님은 “모두 옳다(皆是)”라고 말했다. 장님들의 묘사가 부분적이긴 했지만 코끼리가 아닌 다른 것을 언급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원효 스님은 “모두 틀렸다(皆非)”고 말했다. 어느 누구도 코끼리의 전모를 묘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조성택 교수는 “원효 스님은 ‘장님과 코끼리’라는 잘 알려진 비유를 통해 일상적 실천의 차원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화쟁론을 제시했다”며 “원효는 자신이 살던 당시의 불교적 상황에 대해, 더 나아가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이 비유를 소개했다”고 말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皆)’라는 동시적 상황이다.

조 교수는 “옳다면 ‘모두’ 옳고 틀렸다면 ‘모두’ 동시에 틀렸다는 것은 각기 부분적인 진리성이 있기 때문에 긍정할 수 있으나, 그것은 일부만의 긍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모든 것이 긍정돼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성택 교수는 “원효 스님이 이 비유를 사용할 때 한가지 핵심적 사항은 자신 또한 ‘장님’들 중 한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했다. 나만이 옳고 다른 사람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내가 옳으면 다른 사람도 옳고, 다른 사람이 틀리면 나도 틀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화쟁”이라고 말했다.


원효 스님이 활동하던 7세기 신라불교의 상황은 화엄, 정토, 유식, 반야 등 다양한 성격의 불교경전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적인 권위를 다투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조 교수는 “7세기 신라불교의 상황과 오늘날 한국의 문화적 상황에는 공통되는 점들이 있다”고 말했다.
7세기 신라의 대부분의 학승들은 중국불교의 어느 한 종파에 속하거나 사상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원효 스님은 어느 한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학적 방법을 통해 백가쟁명하던 다양한 교판과 경전적 해석을 하나의 이해 가능한 체계로 통합하고자 했다.

조성택 교수는 “원효 스님은 종요(宗要)와 개합(開合)이라는 특유의 해석학적 전략으로 다양한 교판 등을 회통시켰다. 여기에 하나[一]와 여럿[多]의 관계를 맺어주는 화쟁의 논리적 근거가 담겨있다”고 말했다.

이 근거를 원효 스님은 “‘부분적’인 여러 경전을 통섭해(統), 여러 갈래의 흐름을 ‘한 맛’으로 돌이키며(歸) 부처님의 지극히 올바른 ‘뜻’을 열고 전개해(開), 여러 학파들의 이견을 어아우른다.(統衆典之部分 歸萬流之一味 開佛意之至公 和百家之異諍)”고 <열반경종요>에서 밝혔다.

조 교수는 “각 개별 경전의 부분성을 통합해 불설(佛說)이라는 일미(一味)로 돌이키며, 한편으로는 불설의 의미를 다양하게 전개해 여러 학파의 이쟁을 그대로 살려 화회하는 것이 화쟁의 핵심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원효 스님의 해석학적 전략은 그의 대부분의 저술에서 종요와 개합의 논리로 표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종요의 종(宗)은 일미인 불설이 다양하게 전개됨을, 요(要)는 하나로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개는 하나에서 여럿으로 전개함을, 합은 이를 다시 하나로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성택 교수는 “원효 스님의 종요와 개합은 어떠한 인위적 조작이나 자의적 가치판단이 개입됨이 없이 다양함에서 통일성을 보고, 통일성 가운데서 다양함으로 살려내는 해석학적 전략”이라며 “이것이 서로가 서로를 다투고 경쟁하는 현실세계의 지평에서 열리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만약 코끼리가 아닌 우리가 듣고 보도 못한 어떤 동물을 비유로 들었을 때 우리는 감히 ‘나는 장님이 아니며 그 동물의 전모를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며 “원효 스님은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를 통해 중생이라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진리를 지향할 것인가를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장님’은 중생을 ‘코끼리’는 진리라는 것.

불교 개신교 카톨릭 등 다종교 사회인 오늘날처럼 부처님 당시도 다종교 사회였다.
조성택 교수는 “자이나교도인 시하 장군이 부처님께 귀의하려 했다. 부처님은 그가 불교로 개종할 경우 자이나교가 입을 정신적ㆍ경제적 타격을 고려해 수차례 거절했다”면서 “부처님이 시하 장군이 개종하더라도 자이나교도를 잘 대해줄 것을 다짐받고서야 개종을 허락했던 것은 외도들과 공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상황을 인정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 교수는 아쇼카왕의 제12석주 비문을 예로 들며 “열렬한 불교도였던 아쇼카왕이 백성들에게 강조한 것은 불교에로의 개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의 상호 이해와 공존이다”라고 강조했다.


#“화쟁은 하나지만 하나 아닌 도리”
“열매와 씨가 하나가 아니니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씨와 열매는 단절된 것도 아니니 열매가 이어져서 씨가 생기기 때문이요, 그러나 늘 같음도 아니니 열매가 생기면 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일 때는 씨가 없기 때문이요,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씨일 때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생하는 것이 아니요, 늘 같지도 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멸하는 것이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생하지 않으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두 변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할 수 없고, 하나 가운데 해당하지 않으므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금강삼매경론>

이도흠 교수는 “화쟁의 의미 가운데 하나인 불일불이(不一不二)는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체계”라고 강조했다. 씨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지만 열매와의 ‘차이’를 통해 의미를 갖는다는 것.

이 교수는 홍수를 대비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홍수를 막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댐을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흐르는 대로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댐을 쌓는 것이 근대적ㆍ서구적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라면, 물길을 터서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화쟁의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다.”

신라시대 진성여왕(887~896년) 때 최치원이 함양군 태수로 부임했을 때 그곳의 위천이 해마다 범람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화쟁 사상을 추구한 최치원은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는 대신 물길을 트고 너른 숲을 조성하고 숲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게 했다.

지금도 지리산 자락의 함양에는 활엽수가 폭 200~300m, 2km 길이로 숲을 이룬 상림(上林)이 있다. 1920년대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두 배 규모의 숲에 여러 실개천이 흘렀다.

이 교수는 “씨와 열매의 관계처럼 물은 나무의 양분이 되고 나무는 물을 품어주도록 했다. 화쟁 사상을 실천했던 최치원에 의해 위천은 1000여 년 동안 홍수가 일어나지 않았고 물도 맑게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도흠 교수는 “하나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실체론적인 생명구제행이라면 자연환경을 살려 수억의 생명이 나고 사랑하고 죽는 과정을 되풀이하게 하는 것은 연기적인 생명구제행이다”라면서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은 실체적으로 보면 살생이지만 연기론적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생명구제행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도흠 교수는 “정부의 4대강 사업은 물고기가 나고 죽어 미생물로 변하는 영겁의 순환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며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는 서로 상즉상입한다는 생각으로 아공(我空)을 깨달아 나부터 권력과 자본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그와 나무와 숲처럼 불일불이의 상생을 이루자”고 강조했다.
조동섭 기자 | cetana@gmail.com
2010-08-17 오후 6:02:00
 
한마디
화쟁사상...화쟁사상하지만 힘없는 사람이 어떻게 화쟁을 시킬수가 있겠나요...명분도 중요하지만 실리즉 힘도 중요한 것입니다. 힘없는 화쟁은 공허한 말일뿐 아무런 아무런 소득도 효과는 없는 것입니다.
(2010-08-18 오전 10: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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