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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는 세계적인 문화콘텐츠
‘21세기와 만해’ 학술대회서 이지엽 교수 주장… 한보국 활동 재조명 필요
만해학회와 만해사상실천선양회는 8월 6일 서울 만해학회 사무소에서 21세기와 만해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만해(萬海, 1879~1944) 스님은 일제강점기에 시인·스님·독립운동가로 활약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과 번영에 평생을 바쳤다. 만해 스님이 출가하고 <님의 침묵> 등 명저를 집필한 백담사 인근에서 매년 8월 중순 열리는 ‘만해축전’은 올해로 12회를 맞는다. 만해축전은 국내외 문인과 종교인, 학자, 예술가들이 어우러져 만해의 삶과 사상을 기리고 되새기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한여름의 문화축제’로 부상했다.
만해학회(회장 한계전)와 만해사상실천선양회는 8월 6일 ‘2010 만해축전’을 일주일 앞두고 만해사상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21세기와 만해’를 주제로 서울 만해학회 사무소에서 진행된 이번 세미나에서는 이지엽 경기대 교수가 ‘만해 한용운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김광식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한용운의 아들, 한보국의 삶’을, 유문선 한신대 교수가 ‘국어교과서와 만해’를, 임동확 한신대 교수가 ‘만해와 생명사상’을, 한명환 선문대 강사가 ‘시승의 소설쓰기에 나타난 탈식민주의’를 발표하며 만해와 그의 사상을 고찰했다.

#문화콘텐츠로서의 ‘만해학’
이지엽 교수는 그동안의 만해 스님에 대한 연구를 정리 분석하고 이를 통해 만해 스님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 교수는 “만해 생전인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만해에 관한 논의나 연구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1925년 유광열과 주요한이 쓴 ‘님의 침묵’에 관한 독후감 정도의 글밖에 없었다”며 “이는 만해가 문단 밖의 인물로 간주되거나 만해가 가지고 있던 사상을 따라잡을 만한 식자층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만해 스님에 대한 연구는 문학 분야에서부터 시작됐다. 1937년 간행된 <조선문학집ㆍ시가집>에 만해 스님이 당대의 주요 시인으로 선정돼 ‘나룻배와 행인’ 등의 시편이 수록됐다. 이후 1957년 서정주가 편찬한 <한국시인전집>(학우사刊)에 ‘한용운편’ 이 수록되면서 만해 스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고 1960년대 초 박노준ㆍ인권환의 <만해 한용운 연구> 단행본과 송욱의 논문으로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1960년대 후반에는 활발해지기 시작한 민족주체성 논의와 국학연구의 영향으로 만해 스님 연구는 상당한 조명을 받게 된다. 1975년에는 고은에 의해 집필된 <한용운 평전>이 출간되고 1980~90년대에는 김재홍의 논문을 필두로 대학의 학위논문들이 잇따라 나오게 되면서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 밖에 만해 스님 연구는 크게 연구 내용과 범주에 따라 △불교사상 △민족운동사 △문학 작품에 관한 연구로 나뉘어 진행돼왔다.

이지엽 교수는 “만해에 대한 연구는 민족운동사 내지 역사분야, 불교쪽이 상대적으로 적고, 문학연구가 가장 많은 편이다. 문학 연구에서도 ‘님의 침묵’ 연구에 편향된 감이 없지 않다”며 “한시(漢詩)와 소설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다. 보다 균형 있는 연구가 뒤따라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또 문화콘텐츠로서 ‘만해학’을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이제는 단지 연구자들에 의해서만 향유하고 기리는 것이 아닌, 문화 콘텐츠로서 만해학을 생각해야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만해 스님을 문화콘텐츠화하는 일은 다른 모든 사업의 기초이자 근거가 되는 선결작업임을 전제하고 만해 스님의 문화콘텐츠화 작업이 △기초자료의 수집과 정리 △자료의 분석과 연구 △자료의 전산화와 미디어화를 통한 확산과 활용의 세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설명했다. 또한 이 교수는 만해 스님을 브랜드화 방안으로서 △만해마을의 명소화 △만해의 대중화·세계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만해 스님의 아들 한보국의 삶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승려의 결혼을 강력히 주장했던 만해 스님은 입산ㆍ출가 하기 이전에 결혼을 해, 1904년에 아들 한보국을 낳았다. 그리고 1933년에 또 다시 결혼을 해, 1934년에 딸 한영숙을 두었다. 한보국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으로 넘어갔고, 한영숙은 남한에서 살고 있다.

김광식 교수는 “한용운의 승려결혼에 관련된 내용은 지금껏 그 대강은 밝혀졌지만 한용운의 아들인 한보국에 대해서는 내용이 밝혀지지 않았다”며 “한용운과 한보국의 관계, 한보국의 일생·후손 등을 포함한 한보국의 삶에 대해서는 지금껏 구체적으로 연구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수년 전부터 한보국 연구를 위해 그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이를 통해 한보국의 삶을 복원시키고자 했다. 만해 스님의 아들을 조명, 분석하는 것도 스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판단에서였다.
김 교수는 “한용운은 1930년에 처음으로 그의 아들이 있음을 <별건곤>5권 6호 ‘남 모르는 나의 아들’에서 밝혔다”며 한보국의 생애를 조명했다.

한보국은 생부인 만해 스님이 출가자였기 때문에 일제시대 당시에는 스님과 동거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만해 스님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자신의 모친과 함께 스님의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거주하면서 생활했다. 홍성에서 그는 신간회 활동을 했고, 서울에서는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옥중에 수감됐다. 출옥한 그는 홍성에서 토착적 사회주의 세력을 주도하면서 진보적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8·15 해방공간에서는 홍성지역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국가재건 활동에 매진하고, 한국전쟁때에는 홍성의 인민위원장을 맡았다. 9·28 수복 무렵, 그는 북한으로 올라가서 생활을 하다가 1976년 북한에서 사망했다. 현재 북한에는 그의 딸 다섯 명이 생존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한보국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해 홍성 지역사회에서 기존의 한용운 중심의 선양사업에서 이제는 한보국도 포함을 해서 사업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며 “일제시대 및 해방공간 한보국을 포함해 중도적인 민족운동, 개방적 사회운동, 좌우합작 운동을 했던 진보진영의 역사 복권 작업이 더욱 요청된다. 지금까지의 보수적, 제도권의 역사 작업에서 한 발 더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통에 기반한 탈식민적 글쓰기
이 외에도 국문학 전공학자들이 만해 스님의 문학과 사상을 조명했다.

유문선 한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국어 교과서와 만해’라는 주제 논문에서 1946에서부터 2000년대까지 국어 교과서에 실린 만해 스님의 작품을 고찰했다.
만해 스님의 시 작품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는 ‘복종’ ‘나룻배와 행인’ ‘ 해당화’가 수록됐으며,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는 ‘알 수 없어요’ ‘님의 침묵’ ‘찬송’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 ‘복종’ ‘해당화’가 수록됐다.
유 교수는 “만해와 관련해 국어 교과서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김재홍 교수의 ‘만해 한용운’이 제4~6차 중학 3학년 교과서에 빠짐없이 수록돼 있다는 점이다”고 덧붙였다.
유 교수는 또 “만해 시는 특유의 상상력과 어조 및 표현에서 문학적 상상력의 자양분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리고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린 김재홍 교수의 ‘만해 한용운’같은 글이 이제는 초등학교 교과서로 내려가 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량과 활동 영역으로 보나 만해 스님이 현재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일제 강점기의 위인으로도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 유 교수의 설명이다.

임동확 교수는 주제논문 ‘만해 시와 생명사상’에서 “만해의 모든 시를 불교적 교의나 담론 안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의 시들이 갖고 있는 풍부한 의미와 생명성을 사장(死藏)하거나 희생시키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만해의 시 속에 담은 사랑과 슬픔, 기다림과 이별, 죽음과 고통 등은 내용에 상관없이 본래적 인간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흠이나 잘못이 되지 않는다”며 “만해가 종교인이면서 한 명의 시인으로서 지금껏 인정받는 것은 다름아닌 현실 감각없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시 속에 담기보다,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숨결과 현실감각을 담고 있기에 우리 앞에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명환 교수는 1930년대 만해 스님이 신문에 연재한 소설 <흑풍>과 <박명>을 중심으로 살폈다. 만해 스님이 <흑풍>과 <박명>을 발표하던 시기는 일제가 국내적으로 무단 정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중국대륙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한 교수는 “만해가 <흑풍>과 <박명>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던 시대는 일제의 대륙 침략이 가열됐던 시기였다. 국내의 저항적 리얼리즘 운동은 퇴조하고 신문에 소설이 2~3편씩 연재되고 신문소설론, 통속소설 창작방법론에 대한 붐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고 설명했다.
<흑풍>과 <박명>은 전통적인 이야기구조를 근대적인 상황에 접목시킨 한국 불교대중소설이다. <흑풍>은 신해혁명기의 한 혁명가의 일대기 형식을 취했으며, <박명>은 순영의 상경과 좌절, 구도의 행적을 시간적 흐름에 따라 기술한 여성주인공의 일대기적 방식을 취한 소설이다.
한 교수는 “만해의 독특한 이력을 보면, 그가 어떤 주제의 소설을 써나갔으리라 하는 것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시승, 대처승으로서, 불교계대표, 민족 지도자로서 만해가 걸어온 길은 그 자체로서 1930년대 중반 탈식민적 글쓰기를 예견케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만해는 식민지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시조나 창, 가사, 판소리 등 한국인의 진정한 전통 예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이나은 기자 | bohyung@buddhapia.com
2010-08-13 오후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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