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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 신흥사에서 운영하는 장보고아카데미(대표 법일)는 7월 29일~8월 1일 장보고 대사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엔락쿠지(延曆寺)를 비롯한 일본지역 문화답사를 다녀왔다.
이번 답사에는 장보고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완도지역 어린이 25명과 지도교사 8명 등 33명이 참여했다.
답사에 참여하는 일부 어린이들이 완도 지역 섬에 사는 관계로 하루 전인 28일 신흥사에 모여 일정을 시작했다.
29일 12시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한 배는 일본 후쿠오카를 향해 출발했다. 동해를 지나 일본 영해인 현해탄을 건넜다.
‘현해탄’. 이 뱃길은 우리에게 많은 애증이 담긴 뱃길이다. 삼국시대에 한반도의 선진 문물은 이 뱃길을 통해 일본에 전달됐다. 통일신라에는 장보고 선단이 해외무역항을 만들어 많은 교역이 이뤄졌고, 한국ㆍ일본의 많은 중국유학생들은 이 뱃길을 통해 배움의 길을 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500여 년 후 일본은 이 뱃길을 통해 한반도를 침략하고, 많은 조선의 도공과 문화재를 침탈해 갔다. 일제 병합과 태평양전쟁 때에는 수많은 곡식과 징용자들이 이 길에게 큰 아픔을 겪었다.
30일 고배항에 도착하면서 ‘장보고를 찾아 떠나는 일본문화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일정은 고배지진의 흔적을 공원으로 만든 메모리얼파크와 외국인들의 주거지인 키타노이진칸 답사를 먼저 시작했다. 이어 교토로 이동 키요미즈테라(淸水寺), 임진왜란의 원혼이 담긴 귀무덤을 찾았다.
#장보고 대사와의 깊은 인연을 갖는 엔락쿠지
오후 3시 장보고 대사의 비가 서 있는 엔락쿠지를 갔다. 엔라쿠지는 히에이산(比叡山)에 위치하며, 천태종의 본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장보고 대사와 엔락쿠지와의 인연은 1200여 년전으로 거슬러 간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장보고 대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깊은 인연 등을 글로 남겼다. 엔닌 스님은 장보고 대사의 도움을 받아 당나라에 유학했고, 장보고 대사가 건립한 적산법화원에서 불법을 공부한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고 기술했다. 일본에 돌아온 엔닌 스님은 이름을 크게 떨치고 이곳 엔락쿠지의 중창조로 사찰을 크게 번성케 했다. 한반도에서 잊혀질 뻔한 위대한 인물인 장보고는 한 일본 스님의 저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엔락쿠지를 창건한 사이초(最澄) 스님 또한 신라인이다. 현재 엔라쿠지에는 신라명신을 주신으로 하는 적산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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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불상의 아름다움과 성왕의 동상-법륭사
법륭사에 가면 구세관음과 백제관음 불상 2구를 만날 수 있다. 구세관음이 한국 불상이 된 일화가 있다. 보스턴미술관의 동양학부장인 미국인 어네스트 페놀로사(1853~1908)는 1880~1890년대 일본에서 활동했다. 일본정부는 그를 예술고문으로 임명했다. 일본 내 모든 예술품을 살펴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그는 법륭사 몽전에서 구세관음상을 볼 수 있었다. 그는 500년간 한 번도 풀어본 적 없었던 비단헝겊보자기를 풀었다. 600년경에 통 녹나무로 만든 이 불상은 백제 성왕의 동상이었다. 화려한 총동투조의 관을 목격한 그는 환희에 차 “그렇구나, 한국 것이구나”라고 말했다. 이 말로 구세관음상은 한국의 것이 됐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이후 일본의 학자들은 이 불상을 연구하면서 한국의 것이라 인식만 할 뿐 한국 것이라고 진실을 밝히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구세관음은 1년에 한 번 공개돼 이번 방문에서는 볼 수 없었다. 안타까웠지만 7세기경의 백제불상 ‘백제관음’의 아름다움이 모두를 달랬다. 한국에서 찾기 힘든 백제의 미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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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아스카문명 그리고 동대사
아스카문화는 6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까지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로서 한국의 백제ㆍ신라ㆍ고구려 문화와 중국의 남북조 문화를 수용하여 이룬 문화다. 법륭사를 비롯한 일본의 고찰은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7월의 마지막 날, 답사단은 옛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였던 백제인이 만든 일본 최초의 절 아스카사에 갔다. 현재 임시로 만들어진 아스카사는 본래 탑을 중심으로 동서쪽과 북쪽에 각각 금당을 배치한 사원으로 바깥쪽으로는 회랑이 둘러져 있고 강당도 있는 장대한 가람이었다. 하지만 아스카사(飛鳥寺)의 옛터에 몇 가지 유물만이 듬성듬성 놓여있었다.
“이 부처님은 1405살이 된 아주 오래된 부처님입니다.”
아스카사 터에서 백제양식의 청동본존불 석가여래좌상이 소개됐다. 1405살인데 늙지도 않고 그대로였다. 깨끗했다. 가이드의 말에 철저하게 문화재를 보존하는 이 나라가 부러웠다. 아스카 지역에 이어 세계최대의 청동불상이 있는 동대사를 향했다. 동대사는 한국의 고대 삼국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절이다.
동대사 가람의 총책임자는 고구려인 고려복신(高麗福信)이 맡았다. 청동대불의 주조는 백제인 국중마려(國中麻呂)가, 대불전 건축은 신라인 저명부백세(猪明部百世)가 맡았다.
이 기술자들을 모아 동대사를 완성한 스님은 백제계 행기스님과 양변스님이다. 행기는 백제계로 일본에 건너 간 왕인(王仁) 씨 계족(系族)의 후손이다. 대웅전과 전각들은 대부분 불타 1700년대에 다시 일본식으로 복원한 건물로 지금은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백제무용가 마미지의 공연이 생생한 사천왕사와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오사카성
성덕태자는 일본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인물이다. 백제계인 성덕태자는 오사카, 나라, 교토지역에 많은 사찰을 건립했다. 당시 백제계의 유명한 가문인 소가(蘇我)가문의 후원을 받아 불교국가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비조사, 법륭사, 사천왕사 등은 성덕태자가 발원하여 만든 국찰이다.
아스카문화를 주도한 성덕태자는 사천왕사를 지으면서 백제에 기술자를 요청했다. 이때 간 기술자중 한 사람이 전주 유씨인 유중광(일본이름: 공고시게미츠 金剛重光)이다. 절이 완성되자 성덕태자는 그에게 사천왕사의 보수와 관리를 맡겼다. 그 후 사천왕사의 보수와 관리는 유중광의 후손들이 1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맡아오고 있다. 유중광의 후손들은 목조건축회사 공고구미(金剛組)를 만들었다. 창업주부터 40대째 이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자, 최고의 목조 건축회사가 됐다.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의 양식으로 지어진 사천왕사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바로 석무대이다.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고구려에서 배운 탈춤과 백제무용을 선보인 곳이다. 미마지는 일본 무용의 시조로, 지금도 4월 22일 성덕태자의 기일에는 이곳에서 고대 한반도의 무용이 펼쳐진다.
일본 답사를 마치고 완도로 돌아오는 길에 어린이들은 고대 한반도와 일본을 오가던 문화교류의 흐름을 되새겼다. 하루가 다르게 문화재가 훼손돼 가는 우리의 실정에 100년 혹은 200년 후에 우리는 지금의 것을 잘 계승하고 있을까. 고대 한반도로부터 물려받은 문화를 감추고 왜곡하지만, 그래도 긴 시간을 보존하고 있는 일본을 보면서, 당장의 4대강 공사로 문화재를 수장시키려는 우리의 현재를 보게 된다. 1000년 후 한반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허술한 관리로 잃어버린 국보 1호의 또 다른 복제품이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