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2.2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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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과 위상
불교 사상 교육 의식 등 17개 주제 담아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만해기념관에는 <조선불교유신론>초판본이 전시돼 있다 <조선불교유신론> 초판본 표지는 석전 박한영 스님의 글씨체다.

<조선불교유신론>은 만해 한용운이 불교개혁의 당위성, 지향, 대안을 집약해 1910년 여름에 쓴 불서로 근대불교를 상징한다. 1913년 5월, 불교서관에서 펴낸 <조선불교유신론>은 한국 근현대불교를 개혁하려던 불교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 책이다.
한용운은 이 책자를 발간하기 이전 불교를 통한 근대화에 나서겠다는 도전을 시도했다. 1903년, 백담사에서 출가한 한용운은 승려의 기본 소양을 익힌 후에는 백담사의 본사인 건봉사 강원에서 수학했다. 그 후 한용운은 문명의 중심지인 서양을 탐구하고 싶은 열정으로 세계일주를 단행하고, 서울에 세워진 불교계 최초의 근대학교인 명진학교에서 수학했다. 1908년 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대학에서 유학하면서 일본과 일본불교의 현장을 확인했다.

이렇듯이 문명과 현실의 본질을 체득하고 1908년 10월에 한용운은 귀국했다. 그는 불교가 사회와 민족의 중심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과감한 유신, 개혁을 단행해야 함을 자각했다. 그래서 한용운은 불교의 유신과 개혁을 위한 자신의 소신, 입장, 대안을 옹골차게 피력하는 저술작업을 했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불교유신론>이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17개의 주제로 구분되어 있다. 그는 서론, 불교의 성질, 불교의 주의, 불교유신은 파괴로부터, 승려의 교육, 참선, 염불당의 폐지, 포교, 사원의 위치,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 탱화), 불가의 각종 의식, 승려의 인권회복은 생산에서, 불교의 장래와 승니의 결혼문제, 사원 주지의 선거법, 승려의 단결, 사원의 통할, 결론 등이었다.

만해기념관 내부 모습.

한용운은 우선적으로는 불교가 사회와 문화의 중심으로 활동할 수 있음을 불교의 이념과 근대 이념과의 부합에서 찾았다. 그러나 한용운은 불교가 근대사회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관행, 의식을 과감하게 개혁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즉 구태의연한 교육, 참선, 염불, 사원의 위치, 탱화 등을 개혁 혹은 제거를 주장했다. 그렇지만 한용운은 이 책에서 불교의 개혁을 주장함과 동시에 파격적인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그 대표적인 것인 승려의 결혼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즉 인간의 윤리, 국민의 증대, 포교의 관점에서 승려결혼을 방편적으로 허용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한용운은 승려의 인권과 불교의 존립의 차원에서 승려결혼을 주장했는데, 이런 성격은 승려 노동을 통한 승려 인권회복을 주장한 데에서도 나타났다. 승려들의 단결과 사원의 합리적인 관리를 주장했는데 이는 승려와 불교의 체질이 근대적으로 개선돼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은 당시 불교계에 격심한 찬반 양론을 가져왔다. 거시적으로 보면 근대불교에서 한용운의 주장은 상당 부문 수용됐다. 한용운은 1944년 입적할 때까지 유신론의 개혁이론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실천했다.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제기한 주장, 즉 대중불교론은 학인, 청년학승을 통해 전불교계에 퍼져 나갔다.
<조선불교유신론>은 해방 이후에도 불교와 종단을 개혁하려는 학인, 재가불자들의 필독서가 되어 불교개혁의 이론을 제공한 디딤돌이었다.
글=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 사진=박재완 기자 |
2010-08-09 오후 4: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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