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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의 다도관은 ‘전다삼매(煎茶三昧)’
박동춘 소장 박사 논문서 초의 스님 차문화관에 새 시각 제시
초의 다산도(茶山圖). 초의 스님은 다산 정약용의 명으로 다산도를 그려 정약용에게 보냈다.


‘차문화의 암흑기’였던 조선시대에 차문화를 중흥시킨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1786~1866) 스님의 사상과 차문화관을 알 수 있는 논문이 발표됐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은 최근 동국대대학원 선학과에서 취득한 박사학위 논문인 ‘초의선사의 다문화관 연구’에서 초의 스님의 저술인 <동다송(東茶頌)>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와 스님의 제자인 서암 스님이 초의 스님의 유품목록을 기록한 <일지암서책목록(一枝庵書冊目錄)>등의 자료를 통해 초의 스님의 차이론 정립 및 초의차 완성에 대해 고찰했다.

신라 말 선종(禪宗)과 함께 유입된 차(茶)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왕실과 사찰의 주도 하에 중국 송나라와 비견될 만한 차 문화를 형성하게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배불(排佛)정책으로 인한 왕실의 차에 대한 무관심은 차 문화 쇠퇴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단지 차 문화는 음다(飮茶)의 이로움을 인식했던 문인들이나 수행승들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박동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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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소장은 “초의 스님은 조선 후기 한국 차 문화를 중흥해 쇠퇴 위기에 있던 선차를 복원해 초의차(草衣茶)로 불릴 만큼 뛰어난 품격의 차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며 “그가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를 통해 북학파 경화사족들과의 교류를 확대함으로써 차의 애호 기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1830년대 초의 스님이 봉례품(奉禮品)으로 공여한 초의차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차에 대한 애호와 관심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박 소장은 “김정희, 신위, 정학유 등 당시 북학파 경화사족들은 급변하는 사회ㆍ경제적 현실을 직시하면서 조선의 문화자존의식을 반성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며 “그 일환으로 초의차를 통해 우리차를 알게 됐고 이들은 차의 맑고 담박한 가치가 사람의 마음과 몸을 순화하는 효능을 공유하려 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김정희(1786~1856)와 신위(1769~1845)는 초의 스님이 만든 차에 대한 보완점을 일일이 지적함으로써 지속적인 차품의 향상을 도모했으며 김정희는 초의차를 가장 아끼고 애호했던 사람으로 초의 스님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박동춘 소장은 초의의 유품목록인 <일지암서책목록>을 발굴해 그의 학문적인 토대가 됐던 도서의 종류, 그가 일상에서 사용했던 다구의 재질과 종류, 찻잔의 유형 등을 발견했으며 이에 따른 초의 스님의 탕법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박 소장은 “1970년대 차 문화 운동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탕수를 식혀 차를 우리는 탕법이 유행됐는데 이는 초의 스님의 탕법과는 차이가 있다”며 “현재 유행하는 탕법인 낮은 온도에서 차를 우려내는 방식은 전통을 이은 초의 스님의 탕법이 아니다. 이를 계기로 올바른 탕법으로 돌아갈 기준을 마련해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일지암서책목록>에서는 초의 스님이 교유했던 사람들이 초의 스님에게 보낸 시문, 첩책과 그가 읽었던 도서의 종류도 담겨져 있다. 특히 이 유품 목록에는 <다경(茶經)>과 <다보서기(茶譜序紀)>가 수록돼 있어 초의 스님이 차 이론을 연구하고 천착했던 도서와 초의차의 이론과 실제가 담겨져 있었다.

또한 박 소장은 초의 스님의 다도관도 고찰했다. 박 소장은 “초의 스님의 다도관은 일반적으로 다선일매(茶禪一昧), 다선일여(茶禪一如)로 말해졌으나, 이 용어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 사용됐을 뿐 아니라 선과 차의 의미를 하나로 보는 것이 불합리 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차라고 하는 것은 수행을 할 때의 삼매에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궁극적인 선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일여가 될 수 없다. 즉, 전다삼매(煎茶三昧)라는 것이 박 소장의 설명이다.
추사 김정희의 전다삼매 지본묵서(紙本墨書).

이에 따라 박 소장은 “초의 스님의 다도관은 김정희가 ‘초의차’의 경지를 표현한 ‘다삼매(茶三昧)’, ‘명선(茗禪)’, 전다삼매 등으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특히 전다삼매는 김정희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의 다도관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고 강조했다.
이나은 기자 | bohyung@buddhapia.com
2010-08-09 오후 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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