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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지보사에서 3년간 무문관 수행을 하던 문수 스님은 5월 3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현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유서를 남기고 소신공양했다. 스님의 소신공양은 현 정부는 물론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환경운동을 펼치던 수경 스님은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다”며 승적을 반납하고 홀연히 고행의 길을 떠났다.
소신공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자신의 몸을 불사른다는 것은 생사윤회를 끊지 못한 이들에게는 분노에 의한 자살로 이해됐다. ‘소신공양’이라는 표현도 낯설었다. 그 의미를 알리고 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24시간 기도를 이어가는 곳도 있었지만 여전히 소화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물며 같은 종단의 일부 수행자조차도 그 뜻을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분위기에 불교계는 또 다른 갈등을 빚기도 했다. 과연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문수 스님 49재를 앞두고 참여불교재가연대는 문수 스님 소신공양을 주제로 7월 10일 만해 NGO교육센터에서 세미나를 개최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이 왜곡되거나 폄하되는 데 대해 소신공양의 뜻을 대중들과 공감하고, 뜻을 이어가기 위한 방향을 설정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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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 스님 소신공양 ‘생명살림의 사회화’ 추진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이 한국불교의 사회적 자아형성에 크게 이바지 하고 있다 맥락에서 새로운 한국불교의 사회화로 연결 돼야 한다. ‘깨달음의 사회화’를 계승 발전시켜 ‘생명살림의 사회화’로 추진돼야 한다.”
‘문수 스님 소신공양의 사회적 의미’를 주제 발표한 박희택 불교아카데미 원장은 생명살림의 사회화를 위한 불교지도자들과 불자대중들의 명확한 인식과 참여를 요구했다.
박희택 원장은 ‘새로운 사회화’의 방향으로는 “참 생명은 무생법인(無生法忍: 일체의 것이 본래 생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지혜)”이라는 불교적 생명관을 국민 대중과 나누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생명평화란 무엇인가? 박희택 원장은 “무생무상(無生無相)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볼 때 4대강 사업은 권력의 욕망이 생(生)하였기에 전개된 것으로,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은 무생법인을 한참이나 벗어난 이명박 정권의 맹목적 의지를 가장 강력하게 경고한 것으로 해석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에 대한 불교계 일각의 소극적 대응자세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문수 스님 소신공양의 공덕을 현양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권세에 눈멀지 않고, 순환진리를 체득해 긴 호흡으로 미래한국불교와 나라를 향한 지도력을 발해 나가야 한다.”
이날 박희택 원장은 문수 스님의 삶 전반을 살펴보고, 그의 삶이 믿음ㆍ이해ㆍ수행ㆍ증득(信解行證)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희택 원장은 “수행과 실천의 통일을 통한 열반 성취”라고 평가하고 “문수 스님은 치열한 수행으로 지혜의 안목을 얻고, 소신공양의 열반을 통해 ‘약왕(藥王)’의 자비를 인연함으로써 진정한 완성자가 됐다. ‘지비일체(智悲一體)의 당체’가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분신자살과 소신공양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 스님은 4대강 문제와 부정부패, 서민가난, 소외 등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대의가 있었다. 또 경전에 따른 소신공양의 절차를 갖추고 있다. 경전에서는 이를 “참된 정진이고 참된 법공양으로 가장 존귀하고 가장 으뜸인 보시”라고 설명했다.
백찬홍 에코피스아시아 운영위원장은 논평에서 “스님의 결단은 4대강 사업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것에 대한 연민과 절박감 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무한한 연대감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면서도 “불교바깥의 3자의 입장에서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백찬홍 운영위원장은 “종교를 떠나 사회적 의미로 보면 사회 또는 타자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가차없이 버린 사례는 많이 있었다”며 그들의 죽음의 이유와 사회적 반향, 남은 자들이 어떤 실천을 해야하는가에 초점을 맞출 것을 주문했다.
특히 백 위원장은 문수 스님을 ‘신격화’하려는 것보다는 유지를 이어가기 위한 설천, 종교인들의 자기 혁신과 불교도들의 자기 혁신, 내부 정화, 수행정신 회복 등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했다.
김지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논평에서 “불교적 수행의 전통을 특화시키는 순간 종교적 배타주의의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더 많은 정치적 죽음들, 불교와 특별한 관계가 없는 것까지도 불교적 가르침의 외연에서 포섭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문수 스님의 분신공양을 경전적 전거에 따른 것으로 특화한다면 스님이 사회에 요구하는 의미가 희석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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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은 방생법회
우희종 서울대 교수는 주제발표 ‘불교의 생명사상과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에서 “소신공양은 폭력적 상황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치열한 불교적 저항의 모습이다. 무명으로 인해 질곡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중생을 위해 발휘하는 치열한 비폭력 저항정신 그 자체”라고 정의했다. 우희종 교수는 소신공양을 불교의 생명존중과 비폭력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는 ‘방생’에 비유했다.
“상의상존에 의한 ‘나’는 너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너와 맺어온 관계 덩어리다. 연기적 모습에 근거한 생명이 존재 원리인 불가에서 폭력은 ‘관계의 단절이나 왜곡을 가져오는 행위’다. 어떤 형태의 폭력이건, 폭력을 이기는 것은 오직 관계에 깨어있는 비폭력이다.” 폭력은 ‘관계의 단절이나 왜곡을 가져오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상의상존하는 연기적 관계를 무시하고 상대방을 대상화하는 것이 폭력이며, 억압이다.
그는 “무명으로 인해 왜곡되거나 단절된 관계 속의 나 자신을 포함해 뭇 생명으로 하여금 바람직한 관계, 소통하며 열린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방생”이라며 문수 스님이 뭇 생명과의 소통과 관계성을 위해 선택한 길은 분명한 소신공양이라고 정의했다. 모든 관계속에서 나 하나만을 생각하고, 관계성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이뤄질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럼에도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이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불교계가 찬반의 입장으로 나뉘었고 일부 일반인들이 소신공양에 대해 부정적 반응, 이에 대한 종단의 움직임과 소신공양을 한 문수 스님에 대한 종단의 태도들은 소신공양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생명존중을 강조하는 불교에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소신공양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생명에 대한 집착을 생명 존중이라고 착각하는 일부 일반인들에게는 도피성이거나 부정적인 자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웃종교인 기독교의 십자가 사건과 유사성이 높은 것으로 이타적 목적을 위한 자기 헌신이자, 희생이며 관계회복을 위한 매우 적극적인 자세다.”
방생이라는 것은 결국 한 개체의 살리고 죽이는 문제가 아니라 너와 내가 더불어 보다 바람직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다른 존재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 스스로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됐다. 소신공양은 인드라망으로 연결돼 있는 다른 생명을 살리는 행위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구현하는 행위 그 자체다.
종단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이번 상황에 대한 종단의 처신을 볼 때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의지가 우려된다. 문수 스님의 영결식이 종단장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은해사의 교구장으로서 군위의 지보사에서 봉행됐다는 것은 불교 스스로 소신공양을 개인 분신자살로 폄하한 행위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의 의미와 유지 계승은 종단차원에서 널리 그 뜻을 알리고 스님의 서원이 이루어지도록 승속을 떠나 불교계 전체가 노력해야 한다.”
소신공양을 올린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부당한 권력과 맞서 세속에서 부당한 권력에 투쟁하며 싸워온 열사들의 죽음에 익숙한 이들이 부정적이다”며 “종교인이자 수행자의 소신공양의 의미를 세속의 분신과 동일선상에 놓았기 때문에 생기는 인간적 시각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희조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도 논평에서 “출세간적 윤리의 의미를 세간에 이해시켜야 할 위치에 있는 종단에서 오히려 세속윤리에 휘둘린다면, 이는 자신의 윤리적 근거를 망실하는 것이 될 것”이라며 “출세간적 윤리의 토대가 종단 안에서 근원적으로 정초될 때,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을 바라보는 세속의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웅기 참여불교연대 사무총장은 토론에서 문수 스님 분향소가 설치됐던 조계사 현장에서 느낀점을 위주로 설명했다. 정 사무총장은 “여전히 많은 수의 국민들, 적지 않은 불자들조차 자신의 몸을 불사른 소신공양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불편해 한다. 스님들조차 소신공양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정서가 깔렸다”며 “이런 현실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특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또하나의 살생 아닌가’라는 의문에 답을 줘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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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문수 스님 외에도 역사 속에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 있어왔다. 이들의 죽음은 단순한 자살이 아니다. 이들은 단순히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낸 것이 아니었다. 남은자들에게 죽비와 목탁이었다.
-“내가 이제 온 천하의 많은 동포가 잘못된 길로 떨어지니 그들의 죄를 대신으로 받으려 한다. 이에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독립운동강 나철 선생은 일제의 탄압으로 자신이 창시한 대종교가 불법화되고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상황이 되자 1916년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조식법을 통해 목숨을 끊었다.
-“온천년을 하나같이 살아온 강산이 어쩌다 두 동강이 되어 정성ㆍ공경ㆍ믿음으로 얽히고 설킨 무모형제, 오가지 못하는 이 서러움. 한 많은 38선에 내 한 몸 불살라서 궁을(弓乙) 꽃을 피우나니 겨레여 한 덩어리 궁으로 모이소서.”
천도교 춘천교구장이었던 이도천 선생은 1978년 임진강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아래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유서를 남기고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막아져서는 안됩니다. 한반도에서 미국은 축출되어야만 합니다. 다가오는 올림픽은 반드시 공동개최 되어야만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른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1988년 5월에는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 소속의 조성만은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염원하는 5장 분량의 유서를 남기고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할복투신했다.
-“지금은 민중 주체의 시대다. 4ㆍ19와 6월 민중항쟁을 보라. 민중이 아니면 나라를 바로잡을 주체가 없다. 6월 민주항쟁아르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
2009년 6월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의장이었던 강희남 목사는 남북관계 경색을 우려하며 단식을 하던 중 시국을 비관하며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