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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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중도는 수레 이끄는 두 바퀴
향봉 스님의 <육조단경> 강의 -6
◆설마하반야바라밀(說摩訶般若波􆦯蜜)

“지금 이미 삼보에 스스로 귀의해 모두들 지극한 마음이니, 수행자를 위해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니라. 수행자들이여, 비록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은 하나 알지 못하므로 혜능이 설명해 주리니, 각기 잘 들을지니라. 마하반야바라밀이란 서쪽 나라의 범어로, 당나라 말로는‘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 법문은 모름지기 실행할 것이요, 입으로만 외우는 데 있지 않으니, 입으로 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꼭두각시와 허깨비와 같으나, 닦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어떤 것을 마하라고 하는가?

마하란 크다는 뜻이다. 마음이 한량없이 넓고 커서 허공과 같으나, 다만 빈 마음으로 앉아 있지 말지니, 바로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느니라.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과 대지산하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다 포함하고 있으니 세상 사람의 자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큰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해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 것이 곧 큰 행위이니라.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 있는 이는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또한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워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을 크다고 하나, 이도 또한 옳지 않으니라. 마음이 한량없이 넓고 크지마는 실행하지 않으면 바로 작은 것이니, 입으로만 빈 말을 하면서 큰 행을 닦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어떤 것을 반야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니, 어느 때나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바로 반야행이라 하느니라.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바로 반야가 나거늘,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함은 어리석음을 여읠 수 없느니라.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인도)의 법음(法音)으로서‘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라. 뜻을 알면 생멸(生滅)을 여의나니,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으니, 이는 곧 이 언덕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흐름과 같으니, 바로 저 언덕(彼岸)에 이른다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으로 행하나니, 생각할 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곧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며, 생각 생각마다 행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있다고 하느니라. 이러한 법을 깨달은 이는 반야의 법을 깨달은 것이며 반야의 행을 닦는 것이니라. 닦지 않으면 곧 법부요 한생각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수행자들이여, 번뇌가 바로 보리이니, 앞생각을 붙들어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바로 부처이니라.

수행자들이여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으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다 이 가운데로부터 나와 큰 지혜로써 저 언덕(彼岸)에 이르러 오음의 번뇌와 진로를 타파하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니라.

가장 으뜸임을 찬탄해 최상승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해, 가는 것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면 오는 것 또한 없나니, 이는 정과 혜가 함께해 일체법에 물들지 않음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해 계·정·혜(戒·定·惠)로 삼느니라.

수행자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팔만사천의 지혜를 따르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팔만사천의 진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달은 이는 곧 무념이며,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곧 진여의 성품이니라.

지혜로써 보고 비춰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자성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선지식들이여 만약 깊은 법의 세계에 들고자 하고 반야삼매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바르게 반야바
라밀의 행을 닦을 것이며 오로지 <금강반야바라밀경> 한 권만 지니고 수행하면 바로 자성을 보아 반야 삼매에 들어가느니라.

이 사람의 공덕이 한량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지니, 경에서 분명히 찬탄하였으니, 능히 다 갖춰 설명하지 못하느리라. 이것은 최상승법으로서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해 설법한 것이니, 만약 근기와 지혜가 작은 사람이 이 법을 들으면 마음에 믿음이 나지 않나니, 무엇 때문인가? 비유하면 마치 큰 용이 큰 비를 내리는 것과 같아서 염부제에 비가 내리면 풀잎이 떠내려가고 큰 비가 큰 바다에 내리면 불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 대승의 사람은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들
으면 마음이 열려 깨달아 아나니, 그것은 본래 성품이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의 지혜로써 보고 비춰서 문자를 빌리지 않느니라.

비유하건대, 그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으니, 원래 용왕이 강과 바다 가운데서 이 물을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모든 초목과 모든 유정·무정을 다 윤택하게 하고 그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다시 큰 바다에 들어가서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한 몸으로 합쳐지는 것과 같아서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마하반야바라밀을 청화 스님께서는‘위 없는 진리는 설하다’로 번역하셨습니다. 직역하면‘커다란 지혜로 건너감을 말하다’가 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사바세계요, 고해(苦海)이며 화택(火宅)이자, 예토(穢土)라고 지칭해왔습니다. 하여, 부정적인 의미로 점철된 세계를 이 언덕(此岸)이라 하고 지향해 이뤄내야 할 파라다이스적 이상향을 저 언덕(彼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피안의 세계는 해탈의 세계이며 극락정토이자, 열반락과 행복과 자유를 누리는 다함이 없는 위없는 세계를 말합니다.

불교에는 신이 없습니다. 메시아도 없습니다. 깨달음에는 이르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실천 수행을 으뜸으로 삼고 있습니다. 스스로 수행해 자신을 완성해 가야 합니다. 깨달음을 이뤄 부처가 되는 것이 수행의 최고 목표입니다.

종교 신앙을 크게 둘로 나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을 중심으로 하는 구원의 종교인데 이를 일러 유신론적(有神論的)인 타력신앙(他力信仰)으로 칭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깨달음의 종교인데 이는 무신론적(無神論的)인 자력신앙(自力信仰)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방법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제설법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성스러운 여덟 개의 길이라 해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치고 있고, 이 언덕(此岸)에서 저 언덕(彼岸)에 이르는 길인 육바라밀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라밀은 산스크리트어의 파라미타의 음사입니다. 중국에서는 도피안(到彼岸)이라고도 번역해 쓰
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번민의 세계를 이 언덕으로 말한다면 깨달음을 성취한 대자유인의 세계를 저 언덕(彼岸)이라 해서 양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언덕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고 저 언덕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언덕이 저 언덕이요, 저 언덕이 이 언덕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저 언덕이 이 언덕이 될 것이요, 마음이 열리면 이 언덕이 곧 바로 저 언덕이 되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현생의 오늘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육조 스님의 말씀처럼 극락과 지옥이 이 마음의 작용으로 수시로 바뀌어 가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살아서 윤회하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차안과 피안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열고 사느냐, 닫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많은 제자들에게 쥔 주먹을 펴서 보이며 이렇게 쥔 주먹을 편 것과 같이 간단한 논리와 표현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나 지혜를 갖춘 자는 알아들을 수 있고, 이 말에 의해 행복과 자유를 느끼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물처럼, 공기처럼 널려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졸리면 자는 것처럼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와 나를 차별두지 말 것이며, 소유욕은 한 템포씩 늦춰가며 사는 것입니다.

부처가 말하는 극락세계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마음만 바꾸면 지금, 바로 여러분이 있는 곳이 극락인 것입니다. 불교는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가 아니라, 마음을 중심으로 한 깨달음의 종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시 쉬어가는 셈치고 열반세계의 4가지 덕목인 상락아정(常樂
我淨)에 대해 짧으면서도 바른 해석을 하고자 합니다. <열반경>에 등장하는 상락아정에 대해 그 뜻을 알지 못해 헤매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는 삼법인(三法印)이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그리고 일체개고(一切皆苦)가 바로 삼법인을 뜻합니
다.

영원히 변치않는 진리라는 뜻에서 법인(法印)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탈의 세계인 열반을 성취한 사람에게는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한 것이 아니라 제행은 유상(有常)하다는 것입니다.

일체는 다 괴로운 것(一切皆苦)이 아니라 일체는 다 즐거운것(一切皆樂
)이라는 것입니다. 제법(諸法)에는 무아(無我)가 아니라 모든 것이 나 아님이 없다(諸法有我)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사바예토가 아니라 극락정토라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이면 이르는 곳마다 극락이자 정토이며,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져 형제이자 이웃이며 둘이 아닌 진리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면 주관을 주관대로 객관은 객관대로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 것이며 누
구에게나 좌우는 없는 것이며, 누구라도 이르는 곳 마다 주인(數處作住)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혜능 선사가 강조하고 있는 커다란 지혜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에 이르는 바라밀은 입의 노동에 있지 않고, 실천수행의 정진력에서 비롯됨을 알아야 합니다.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몸으로 행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혜능 선사는‘앞생각에 붙들려 미혹하면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바로 부처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지혜)와 바라밀(수행법)에는 기적도 가피도 영험설화도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연기 법칙과 두변을 떠난(無辺中心) 중도사상만이 반야바라밀을 이루는 두 개의 수레바퀴이자 새의 두 날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끝으로 시원한 일화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선지식 일휴 선사가 사미승 한명과 생선 굽는 식당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일휴 선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생선 굽는 냄새가 참으로 구수하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이 한마디에 어린 사미승은 실망과 좌절감을 느끼며 한참을 뒤따라오다 스승인 일휴 선사에게 말했습니다.
“큰 스님으로 모셨는데 생선 굽는 냄새에도 자유롭지 못하시니 실망스럽습니다.”
그러자 일휴 선사가 사미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 같이 답했습니다. “나는 생선 굽는 냄새를 그 식당 앞에서 버려두고 왔는데 너는 그 냄새를 여기까지 들고 왔구나.”
이은정 기자 | soej84@buddhapia.com
2010-07-14 오후 2: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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