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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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부를 보게 하리라
향봉 스님의 <육조단경> 강의 -4
◆ 귀의자성삼신불(歸依自性三身佛)

“수행자들이여, 모두 모름지기 자기의 몸으로 모양(相)을 여읜 무상계(無相械)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수행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삼신불(三身佛)을 보게 하리라.

‘나의 색신의 청정법신불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화신불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당래 원만보신불에 귀의합니다’하라. 색신은 집과 같으므로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은 자기의 법성(法性)속에 있고 사람마다 다 가진 것이나 미혹해 보지 못하고 밖으로 삼신부처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는 보지 못하느니라. 수행자들은 들을지니, 각기 자기의 색신에 잇는 자기의 법성이 삼신불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하리라.

이 삼신의 부처는 자성으로부터 생기나니, 어떤 것을 청정법신불이라고 하는가? 세상 사람들 성품은 본래로 청정해 만 가지 법이 다 자기의 성품이 갖춰 있나니,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바로 악을 행하게 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바로 착한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가운데 있으며 자성은 항상 청정함을 알아야 한다.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하나니,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세상 사람들의 자성이 깨끗함도 맑은 하늘과 같고 지혜는 해와 달과 같으니라. 지혜는 항상 밝지만은 밖으로 경계에 집착해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니라. 그러므로 선지식을 만나 참 법문을 열어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버리면 안팎이 사무쳐 밝아서 자기의 성품(自性)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게 되나니,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 이름한다.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自歸依)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해 귀의함이라 하느니라. 무엇을 천백억화신불이라고 하는가? 헤아리지 않으면 자성은 바로 비어 있어 고요하지만 생각하고 헤아리면 곧 바로 스스로 변화하나니, 악한 것을 생각하면 변화해 지옥이 되고 착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해 천당이 되고 독과 해침은 변화해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화해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해 윗세계가 되고 우치함은 변화해 아랫 나라가 돼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하느니라.

한 생각이 착하면 바로 지혜가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해 자성화신불이라 하느니라. 무엇을 원만보신불이라고 하는가? 한 등불이 능히 천 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 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를 생각할지니,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이름해 보신불이라 하느니라.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 년의 착함을 도리어 그치게 하고, 한 생각의 착한 과보는 천 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나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착함을 보신이라고 이름 한다. 법신을 좇아 생각함이 바로 화신이요, 생각마다 착한 것이 바로 보신이며,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음이 바로 귀의라 이름 하나니, 가죽과 살은 색신이며 집이므로 귀의할
곳이 아니며, 다만 삼신을 깨달으면 바로 큰 뜻을 아느니라.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에 귀의했으니, 선지식들과 더불어 네 가지 넓고 큰 서원을 발한다. 선지식들이여, 다 함께 혜능을 따라 외울지니‘무량한 중생을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 다 이루기를 서원합니다.’

수행자들이여 무량한 중생을 맹세코 다 제도한다 함은 혜능이 수행자들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중생을 각기 자기 몸에 있는 자기의 성품으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자기 성품으로 스스로 제도한다고 하는가? 자기 육신 속의 삿된 견해와 번뇌와 어리석음과 미망에 본래 깨달음의 성품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므로 바른 생각으로 제도하는 것이니라. 이미 바른 생각인 반야(般若)의 지혜를 깨달아서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버리면 중생들 저마다 스스로를 제도하는 것이다.

삿됨이 오면 바름으로 제도하고, 미혹함이 오면 깨달음으로 제도하고,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악함이 오면 착함으로 제도하며 번뇌가 오면 보리로 제도하나니, 이렇게 제도함을 진실한 제도라고 한다. 무량한 번뇌를 맹세코 다 끊다 함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량한 법문을 맹세코 다 배운다 함은 위없는 바른 법을 배우는 것이며,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이룬다 함을 항상 마음을 낮추는 행동으로 일체를 공경하며 미혹한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서 반야의 지혜가 생기고 미망함을 없애는 것이니, 바로 스스로 깨달아 불도를 이뤄 맹세코 서원을 행하는 것이다.”



자성삼신불(自性三身佛)은 자성삼귀의(自性三歸依)를 의미합니다. 불교에서 삼귀의는 세 가지 보배로운 곳에 돌아가 의지함을 말합니다. 첫째가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이요, 둘째가 깨달음의 내용이 담긴 경전을 말합니다. 셋째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 수행하는 스님들을 뜻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요, 진리의 내용이 담긴 법은 정(正)이며 승려는 청정함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참다운 귀의는 자성삼보(自性三寶)에 돌아가 의지함을 말합니다. 자성삼보의 첫째는 마음속의 깨달음에 귀의해 사됨과 미혹함을 여의어 적은 것으로서 민족을 삼으며 능히 재색(財色)에 대한 집착심을 말끔히 벗어나 막힘과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에 이르는 길을 말합니다.

둘째는 마음의 바른 진리에 귀의해, 생각이 맑아 사된 견해가 없으며 나와 남을 분별해 차별하지 않으며, 소유욕을 앞세우거나 애욕으로 인한 타는 목마름이 없게 해 드러난 진리와 둘이 아닌 하나가 됨을 말합니다. 셋째는 마음의 청정함에 귀의함이니, 밖으로는 정계에 끄달리지 않고 안으로는 헐떡임이 없어, 번뇌 망상의 찌꺼기도 남아 있지 않은, 물듬과 집착심을 여윈 마음의 평화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젊은 시절, 저는 삼귀의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수직이 아닌 수평의 종교입니다. 불교는 구원을 약속해 주는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깨닫는 종교입니다. 하여, 불교에는 메시아가 있을 수 없고 주입식의 가르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부처는 진리를 깨달은 위대한 스승일 뿐이고 불교도는 그의 제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돌아가 의지 한다니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뒷날 <화엄경>을 공부하고 화엄경현담을 읽다가 귀경삼보(歸敬三寶)라는 문구를 만나게 됩니다. 귀의삼보(歸依三寶)가 아니라 귀경삼보라는 말은 의지할 의(依)자가 공경할 경(敬)자로 바뀌어 있는 부분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화엄경>에서는 주지삼보(住持三寶)와 동체삼보(同體三寶)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쇠를 녹여 철불을 만들고 나무를 다듬어 목불을 만들며 종이로는 지불을, 흙으로는 토불을 만들어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을 주지삼보라고 합니다. 별상삼보(別相三寶)는 천년된 나무와 바위와 흙, 그대로의 모습에서 부처의 모습으로 받아들여 열린신앙, 열린 마음의 법당 아닌 곳 없고 삼라만상 그대로가 불보살 아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설명할 부분은 동체삼보입니다. 불·법·승 삼보와 극락정토가 멀리 있는게 아니라 내가 머물고 있는 가정, 내가 서 있는 곳 그대로가 삼보가 깃들어 머무는 곳이요, 내 몸 안에 정토의 안락과 평화, 자유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충만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언제나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물처럼 공기처럼 자갈처럼 널려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드러난 진리와 한 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집착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습관의 고리, 관습의 벽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혜능 이전에는 자성삼귀의가 없었습니다. 혜능에 의해 삼귀의해야 할 부처님과 진리의 가르침이 그리고 화합과 평화의 상징인 승가가 내 몸 안에 청정법신으로 이미 갖춰져 있었던 것입니다. 철저히 버렸을 때 이룰 수있습니다. 진공(眞空)에서 만이 묘유(竗有)가 있는 법입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사찰에 비구니 셋이 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 20년 넘게 오로지 참선만을 해온 중진 비구니 스님들이었습니다. 내가 세 분의 스님께 물었습니다.

“진공묘유(眞空竗有)중 진공묘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어떤 것이 유(有)인지 만 답변해 주시지요”라고 묻자, 비구니 스님 세 분은 답변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신 답변을 했습니다.
“비어 있으나 가득하고 가득하나 비어 있습니다.”

붓다가 세상을 떠날 때 제자들은 이제 누구에 의지하고 살아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부처는‘내 이름에 집착하지 말고 내 가르침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등불로서 스승을 삼고, 마음의 등불로서 스승을 삼으라는 것이 최후의 유언이었습니다. 동체삼보(同體三寶)는 결국 내 주변에 머무는 것들을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마음이 열리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 주변의 상황을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열리면 어는 곳에 머물고 있더라도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내가 머무는 곳이 곧 중심이다’라는 것이 동체삼보입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색신에 귀의하는 것이 아닌, 청정법신승가에 귀의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는 것은 성품이 본래 청정해서
만 가지 법이 마음 작용으로 비롯된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굉장히 맑습니다. 부처님 마음은 마치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어린아이가 성장하면서 육문(六門)에서 일어나는 육진(六塵)의 작용에 의해 의식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본래가 청정하다보니 사람은 누구나 궤도를 이탈하고 헐떡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꾸준히 청정법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원만보신불(圓滿報身佛)은 한 등불의 빛이 천 년된 어둠을 밝히듯이 한 지혜가 만 년 된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가장 큰 병은 집착입니다.

이미 흘러간 과거에도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을 뚜렷하게 밝혀 성품을 꿰뚫어 보면 선악에 물들지 않은 참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번뇌를 끊기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번뇌가 없으면 보리도 없습니다. 지옥이 없으면 극락도 필요 없습니다.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원효 대사는 신라의 승려로 당나라로 가는 유학길 중 간밤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대오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육조 스님은 바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청정법신이고, 원만보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를 따로 구하지 말며, 마음이 열려있으면 곧 자신이 부처임을 알아야 합니다.

<중아함경(中阿含經)>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 있습니다. 마룬캬라고 불리는 청년이 하루는 석가를 찾아와 이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사람은 죽은 다음에도 존재하는가? 아니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가? 영혼과 육체는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 등을 따져 물었습니다.

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독화살이 어떤 사람의 몸에 박혔다고 하자. 그럴 경우 독화살을 빨리 제고하고 치료 하는게 좋겠는가? 아니면 독화살을 빼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 채 누가 화살을 만들었으며 누가 화살을 쏘았으며 화살을 쏜 이유는 무엇이며, 화살촉에는 무슨 독이 묻어 있는지를 따지고 있어야 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독화살이 박힌 순간 바로 빼내 치유하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현재입니다.
이은정 기자 | soej84@buddhapia.com
2010-07-14 오후 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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