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수선정(敎授禪定)
“수행자의 좌선은 원래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또한 움직임도(움직이지 않음도)말하지 않는다.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
에 볼 것이 없다. 만약 깨끗함을 본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여(眞如)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만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하다.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본다고 하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분별하는 망상(淨妄)이 생긴다. 망상은 처소가 없다.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허망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淨縛) 된다.
만약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이가 사람들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자성(自性)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남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道)와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보고 또는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道)를 장애하는 인연이다.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음이 선(禪)이다. 어떤
것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相)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니라. 가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그대로 깨끗하고 그대로 정(定)이다.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치게 되면 곧 어지럽게 된다. 모양(相)을 여의고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다. 밖으로 모양(相)을 떠나는 것이 곧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함을 선정(禪定)이라 이름 한다.
<유마경>에는‘즉시에 활연히 깨달아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다’고 했고, 보살계에 말씀하시기를‘본래 근원인 자성(自性)이 청정하다’고 했다. 자기 성품이 스스로 청정함을 볼지니, 스스로 닦아 스스로 이룸이
자기 성품인 법신(法身)이며, 법신 그대로 행함이 부처님의 행위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道)이다.”
육조 혜능 대사는 제자들에게‘교수선정(敎授禪定)’을 통해 어느 것이 선(禪)이고 정(定)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이라는 말은 고어(古語)에서는 생각과 모든 것을 쉬어 버린다는 뜻으로 이야기 합니다. 선이라는 것은 신수 스님이‘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하라’라는 말처럼 그대로 닦고 고르고 쉰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고 말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은 불행했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만족을 느낀다면 행복을 추구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팍팍하고 고단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평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에 의해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흔들립니다. 그래서 정(定)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정(禪定)에 대해 잘 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닦는 사람을 길흉사도 점칠 수 있는 예지력있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도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고어사전에서 살펴보면 도인이라는 말은 도교를 숭상하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도인은 선지식이라는 말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선지식이라는 말도 예지능력이나 모든 도에 통달됐다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선지식이라는 뜻은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착한 벗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풀이돼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사와 장삼을 입었더라도 마음을 헐떡이는 자는 중이 아니라고 말하셨습니다. 30~50년 동안 수행을 해서 마음이 열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참사람''입니다. 이 세상 가장 훌륭한 사람은
가장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일반사람들이 선정삼매가 굉장히 멀리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진리는 항시 우리 눈앞에 널려 있는게 진리 입니다. 다만 우리가 진리와 한 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집착의 고리를 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선방은 구조적으로 잘못돼 가고 있습니다. 중국의 어록에 나오는 선방이라는 것은 간절심이 들어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음을 여는 것인데, 한국은 격식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조 혜능 대사는‘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집착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것이 좌선인가? 막힘과 걸림이 없는 밖으로 착함과 악함이 경계에 부딪쳐도 싫고 좋음의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음이 좌(坐)요, 안으로 성품이 맑고 고요해 움직임이 없는 것은 선(禪)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끼리 싸우게 되면 서로 양보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양보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허망하다는 것을 재해무상 재법무아라고 말하지만 탁상공론일 뿐입니다. 일체가 허망하다는 생각을 머리로만 굴리는 것이 아닌 몸으로 실천을 해야만 선정에 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밖으로 반연을 쉬는 것이 좌요, 안으로 헐떡임이 없는
것이 선입니다.
어떠한 것이 선정인가? 밖으로 차별심과 분별심을 여윈 것이 선이요, 안으로 고요하고 맑아 흔들림이 없는 것을 정이라 합니다. 정진함에 있어 밖의 경계에 마음이 끌려가게 되면 정이 흩어질 것이요, 차별심과 집착심을 거둬들여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게 되면 다시 정에 들것입니다. 그러므로 밖으로 생각을 거둠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입니다.
좌선함에 있어 마음이 고요에만 집착해서도 안되고, 깨끗하고 맑은 데에만 집착해서도 안됩니다. 움직이지 않는 데에도 집착하지 말아야합니다. 밖으로의 경계를 차츰 쉬어 안으로의 맑음이 스스로 찾아 들게 해야 합니다. 바람에 의해 구름이 스스로 빗겨 가면 단박에 태양을 보게 되니, 서둘거나 헐떡이며 조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수행자는 나쁜일, 좋은 일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한결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닦아 나가되 안으로는 맑음과 고요함이 물결을 잠재운 바다같이 해야 합니다.
물결이 잦아든 바다에는 저절로 해인(海印)이 뚜렷하게 비치리니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움직임이 있고 흔들림이 없는 가운데 간절함이 움직여 스스로 짓지 않은 가운데 지음이 있어 마침내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중국에 있을 당시, 스님을 한 분 만났는데 그 스님에게 제가 어떻게 깨치게 됐냐고 물었습니다. 그 스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한해 겨울을 어느 산에서 움막생활을 하며 지냈
습니다. 손발이 얼고, 건강상태가 안 좋아질 정도로 정진을 했지만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봄이 되니 그 산에 고사리를 꺾기 위해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어느 아낙네가 고사를 꺾어 스님 움막에 갖다 놓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스님이 자신도 모르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낙네가 기다려 진 것입니다. 스님은‘내가 진정 이러고도 구도자인가’라며 참
괴심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탄을 하며 화두를 들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깨쳤다고 합니다. 깨친다는 것은 얼마나 진실로 간절한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번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불꽃을 얻기 위
해서는 간절함을 다해 단박에 열심히 불을 피워야 합니다. 쉬엄쉬엄 나무를 비벼서는 절대 불꽃을 얻을 수없습니다.
수처작주(隨處作住)를 말을 남긴 인제 스님의 게송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是是非非都不關(시시비비도부관)
山山水水任自閑(산산수수임자한)
莫問西天安養國(막문서천안양국)
白雲斷處有靑山(백운단처유청산)
시시비비 내 알바 아니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한가로운것을
서천의 극락세계 묻지 말게나
구름 걷히면 그대로 청산인 것을
부처 중생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유마경>의 말씀처럼 그 본심이 그 자리에서 단박에 깨달음을 성취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