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부터‘향봉 스님의 육조단경 강의’를 10회에 걸쳐 싣습니다. 향봉 스님은 지난 5월 12일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서울 신정동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교육장에서 <육조단경>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향봉 스님은“불교의 핵심은 중도다. 중도는 유교의 중용과 다르다. 불교 중도는 좌우가 없고 변두리가 없다. 내가 어느 곳에 서있어도 세상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며 세상의 주인인 것이다. 임제 선사가 일찍이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住)가 바로 불교의 중도를 풀이한 것”이라는 말로 강의를 하게 된 연유를 설명했습니다. 향봉 스님은 1962년 출가했으며, 90년대 초 불교신문사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인도, 티벳트, 네팔, 중국에서 15년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정진을 거듭해 오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새로운 종교적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익산 사자암에 주석하고 있으며 <사람의 길> <생활선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 <움직이는 것은 아름답다> 등 20여 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오법전의(悟法傳依)
<육조단경>은 총 10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번 첫 번째 시간에는 혜능 대사가 진리를 깨달아 가사를 전수받는 교훈적· 전설적 과정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 장은‘오법전의(悟法傳依)’로 육조 혜능 대사가 법(法)을 깨닫고 가사를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혜능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땔나무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청년이었다. 어느 날 땔나무를 팔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우연히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게 됐다. 당시 22세였던 혜능은 <금강경> 한 구절 한 구절에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그 후 혜능은 구도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 오조홍인 선사를 만나러 간다. 홍인 선사는 자신을 찾아온 혜능에게“어디서 무엇을 하려 왔느냐”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혜능은“영남에서 왔으며 깨달음을 이뤄 부처가 되기 위해 찾아 왔다”고 대답한다. 이에 홍인 선사는“영남은 버려진 땅이라 무식꾼들이 많은 곳”이라고 핀잔을 준다. 하지만 혜능은 오히려 당당하게“부처를 이루는데는 출신이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홍인 대사는 혜능이 큰 법기(法器)임을 알아차리고 후원에서 방아 찧는 일을하도록 허락한다. 당시 오조 홍인 선사의 문하에는 교수사인 신수 스님을 비롯해 700여 명의 대중이 모여 정진하고 있었다. 하루는 오조 홍인 선사가 대중을 모아, 그 동안의 마음공부를 게송으로 담아오면 이를 점검해 육조로 삼겠다고 선포한다. 당시 700명 대중의 교수사이던 신수 스님은 며칠 밤을 궁리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벽에 붙여놓는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時時勤佛式)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하라(莫使有塵埃)
홍인 선사는 벽에 붙어있는 게송을 보고 대중들에게 칭찬하며 게송처럼 수행하라고 격려했다. 대중들이 너나없이 게송을 외우고 다니자 방앗간에서 일하던 혜능이 이 게송을 듣게 됐다. 혜능은 신수의 게송이 미흡함을 알아차리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다음과같은 게송을 대필로 써서 벽에 붙인다.
마음이 보리의 나무요(心是菩提樹)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身爲明鏡臺)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明鏡本淸淨)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河處染塵埃)
오조 홍인 선사는 혜능 행자의 게송을 보고 단박에 열린 마음을 알아차렸으나 대중이 시기할 것을 우려해‘아직은 덜 열린 게송’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조 홍인 선사는 그날 밤 행자 혜능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 <금강경>에 담긴 진리의 세계에 대해 설법해 준다. 그리곤 혜능에게 법을 상징하는 가사를 전수한다. 홍인 선사는 육조가 된 혜능을 구강역의 나루터까지 배웅해 주고 배를 태워 떠나보낸다. 오조 홍인
선사와 헤어진 육조 혜능은 두 달 가량 지나 대유령이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한편 행자 혜능에게 가사가 전해짐을 알게 된 대중들은 크게 동요하며,가사를 뺏으러 혜능의 뒤를 쫓아온다. 다른 대중들은 두 달이 돼도 혜능
을 찾지 못하자 다들 돌아갔으나 장군 출신인 진혜명이라는 스님만이
대유령까지 쫓아와 혜능을 만난다. 혜능은 진혜명에게 가사를 건네려 하자, 혜명은 법을 구하려 왔을 뿐 가사를 탐하러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혜능은 혜명에게 법을 전하고 북쪽으로 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당부한다.
위의 내용이 바로 <육조단경>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본래 <육조단경>은 덕이본, 종보본, 동황본 등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덕이본이, 일본에서는 종보본이 많이 유포돼 왔으나 요즘에는 가
장 기록 연대가 앞선 돈황본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덕이본과 종보본이 돈황본에 비해 문학적으로 다듬어지며 재미를 더한 부분이 많습니다. 강의는 교재에 나오지 않는 돈황본이나, 덕이
본에 나오는 내용까지 곁들여서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그럼 덕이본에 있으나 돈황본에는 없는 내용들을말씀드리겠습니다.
1. 혜능이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구절에서 발심하는 것으로 돼있으나 돈황본에서는 <금강경>만 등장한다.
2. 덕이본에서는 의발을 뺏으러온 혜명에게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하라는 법문을 혜능이 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돈황본에서는 그냥 법문한 것으로돼있다.
3. 덕이본에서는‘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며, 그대들의 마음이 흔들리는것’이라는 유명한 말이 담겨있으나,돈황본에는 이 내용이 빠져있다.
4. 신수 스님의 게송에 대해 혜능의 대응이 덕이본에서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돈황본에서는 불성상청정(佛性賞淸淨)으로 돼있다.
하지만 큰 틀의 뿌리와 나무에서 풍겨오는 교훈적인 가르침에는 변함이 없다 하겠습니다.이번 시간에는 돈황본에는 없는 응무소주 이생기심과 불사선 불사악하라는 구절에 대해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두 경구가 매우 중요한 가르침인데도 해석의 견해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승려든 교수든 불교학이든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에 대해서‘마땅히 머무는바 없이 그생각을 낼지어다’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견해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이 말의 뜻을‘한 생각이 일어났거든 마땅히 거기에 머물지 말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금강경>은 깨달은 사람을 위해 설해진 경전이 아니고 깨달음으로 사람을 인도해가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머무는바 없이 생각을 낼 수 있는 것은일을 해 마친 성자(聖者)들의 몫입니다. 화두로 생각을
모아가는데도 온갖 망상과 번뇌가 머릿속에서 생명을 거듭합니다. 다시 마음을 모아 화두를 챙겨보지만 습관의 고리, 집착의 병으로 인해 온갖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화두 사이사이 목마름과 헐떡임, 흔들림 등의
온갖 번뇌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각의 윤회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생각의 윤회는 거듭되기 마련입니다. 중생이 앓는모든 병의 원인은 집착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한 생각이 일어났거든 마땅히 거기에 머물지 말라’가 바른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은‘착함도 생각지 말고 악함도 생각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불사선 불사악에는 그 이상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인간존재 원리와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불교의 핵심사상
인 중도의 원리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희랍인들은‘중(中)은 정(正)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팔정도(八正道)가 곧 중도(中道)다’라고 거듭강조한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에서‘불교의 중도에는 변두리가 없다’고 단언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인간선언의 존엄성과 마음이 부처다(卽心是佛)의 인불사상(人佛思想) 그리고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의 최후의유훈에 이르기까지 부처님께서는 중도적인 삶을 사셨고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유교의 중용(中庸)과 불교의 중도(中道)를 형제사이로 알고 있는 한 중도에 대한 바른 이해는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손자에는‘자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책이 바로 <중용>입니다.
자사는 중용에서 덕과 도를 인간 행위의 최고기준으로 삼을 것을 가르칩니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다섯 가지 덕목을 삶의 지표로 삼되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고 치우침이 없는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고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중도사상은 유교의 중용사상과는 근본부터 다른 것입니다. 유교의 중용이 좌우불락(左右不落)사상이라면, 불교의 중도는 양변무애(兩辺無碍)이자 무변중심(無辺中心)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동쪽이라 하고 해가지는 방향을 서쪽이라 칭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디를 동(東)라 하며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서(西)라고 합니까? 정답은 누구나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곳을기준으로 해 뜨는 방향을 동쪽이라 하고 해지는 방향을 서쪽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 서, 남, 북의 중심에는 누가 있겠습니까? 바로 내가 있는 곳이 동서남북의 중심인 것입니다. 세상의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
으며 동서남북의 중앙인 나는 곧 우주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도에는 좌우가 없고 변두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사선 불사악도 중도적인 안목과 견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住) 또한 바른 중도를 밝힌 것이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