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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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속의 문화읽기-13. 순천 선암사(仙巖寺)- 소설가 조정래가 나고 자란 곳
모든 것들이 시간의 먼지를 털며 되살아난다

“너, 부처님 앞으로 가라.”
“예에에……?”
“그 험한 난리 속에서도 너희 여섯 형제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다 부처님의 가피 덕분이었다. 장남은 좀 그러니 차남인 네가 가는 게 좋겠다.”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는 스님이 될 뻔했다. 고등학생 조정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저항했다. 스님이 되고 싶지 않다고. 글을 쓰고 싶다고.

조정래(1943~)는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종현은 선암사의 부주지(철운ㆍ鐵雲)였고, 시조시인이었다. 비구였던 철운 스님은 일제의 종교황국화 정책에 의해 대처승이 됐고 조정래는 태어났다. 그는 “그러니까 저는 일제의 은혜(?)로 풍경 소리와 목탁 소리를 태교 삼아 태어난 목숨입니다.”고 했다.

비에 젖은 승선교가 안개에 업혀 저녁을 기다리고, 일주문처럼 서있는 강선루의 처마 끝은 멀리서 들려오는 산새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5년(527)에 아도화상이 현재의 비로암에 터를 잡아 창건했고, 해천사(海川寺)라 했다. 도선국사가 지금의 터에 중창을 했고, 의천대각국사가 선암사로 중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정래는 선암사에서 오래 살지 못했다.
“그 때 제 나이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 총을 겨눈 군인들의 발길질에 걷어채어 나뒹굴며 끌려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법일 스님이 해방 후 좌익으로 몰려 고초를 겪는 이야기는 아버지 철운 스님의 이야기다. 철운 스님은 “사답(寺畓)을 농민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했다가 좌익으로 몰려 고초를 겪게 되고, 그 일이 있은 후 그의 집안은 선암사를 떠나게 된다.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후, 이 땅은 이념의 대립으로 몸부림친다. <태백산맥>은 그 몸부림의 이야기다. 그는 소설에서 좌익 빨치산의 문제를 이념의 문제가 아닌 계층간의 갈등으로 해석했고, 그 갈등의 근원은 생존이 걸린 ‘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와 소설의 중심이었던 땅에는 선암사도 있었다. 소설가가 된 그가 <태백산맥>이라는 작품을 쓰게 된 것이 어찌 보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조정래의 대표작인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은 모두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주로 이 땅의 아픈 역사를 마주하고 있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등 어린 시절에 겪었던 슬픈 역사가 그의 문학적 토양과 작가의식의 저변이 됐고, 훗날 그는 멀어진 그 기억들로 소설을 썼다.

“저는 20년 동안이나 방에 갇혀 술 한 잔 안마시고 글을 썼어요. 그뿐인가요. 평생 주색잡기라곤 한 일이 없습니다. 뭐 별 이야기는 아니고 승려가 되었더라도 충실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 얘기죠.”
그렇다. 그는 출가하지 않았지만 그의 뼈마디에는 기억할 수 없는 시절부터 들어온 선암사의 풍경 소리와 목탁 소리가 배어 있다.
“저는 사실 글을 써오는 40년 동안 가끔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승려나 신부의 수도 생활이라는 것이 뭐 별것이겠는가…… 글감옥에 갇혀 절연 상태로 10년, 20년 세월을 보내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수도가 아닐것인가.” 그는 수도하듯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했다.

그의 소설에는 스님이 나오고, 부처님 말씀이 나오고, 선암사가 나온다.
‘사철 맑은 물이 촬촬 흘러내리던 개울, 물에 비치는 그림자까지 합치면 보름달 같은 원이 되던 두 개의 쌍둥이 다리 승선교(昇仙橋), 햇살이 스밀 수가 없도록 울창하던 길고 긴 숲길,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짙게 퍼지던 대웅전 앞뜰의 수국꽃 향기, 항시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본존불, 겨울새벽의 냉기 속을 슬픈 울음이듯 끝없이 울려퍼지던 쇠북소리…. 젊은 날의 기억들을 보듬고 있는 선암사의 모든 것들이 시간의 먼지를 털며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가 먼 기억으로부터 불러온 소설 속의 선암사가 안개 숲 너머에 그렇게 있었다.

선암사에 간다면 눈에 비친 선암사의 풍경을 선명하게 간직해서 돌아올 일이다. 멀어지는 것이 기억이지만 잊히지 않는 것 또한 기억이다. 한 작가의 멀어진 기억이, 하지만 잊히지 않았던 기억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 번 쯤은 읽어야 할 소설 한 편을 만들었다. 쇠북소리가 들려왔다.
글ㆍ사진=박재완 기자 | wanihollo@hanmail.net
2010-07-08 오후 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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