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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국시로 정한 조선시대 가운데 세종시대(1418~1450)는 유교로 전환되는 과도기였다.
특히 세종은 정치 행정면에서 조선적 유교화의 틀을 정립한 군주였다. 자신이 살던 유교사회에서 스스로가 유교 군주임을 자처하던 세종은 불교의 인과설에 바탕을 둔 공덕 짓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교 사회의 백성들에게 효를 비롯한 당시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했다.
김종명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불교학연구회(회장 본각)가 최근 펴낸 <불교학연구> 제25호에 투고한 ‘세종의 불교관과 유교 정치’에서 세종의 불교관이 유교 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김종명 교수는 “세종은 많은 유신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사 행위를 추진했으며, 그는 자신의 불교관을 관철시키기 위해 정치적 조치까지 취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세종실록> <월인천강지곡(月印天江之曲)>등 세종과 관련된 자료를 토대로 “1435년 5월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인과설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1440년에 그는 부처를 공경할 것임을 공언했다”고 설명했다.
세종은 1443년 한글을 창제하고 3년 뒤에 이를 반포했는데, 여기서 한글로 번역된 책의 대부분은 불교 관련 서적들이었다.
김 교수는 “세종은 그의 비 소헌왕후가 1446년에 세상을 떠나자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가모니의 일생에 대한 상세한 기록인 <석보상절>을 짓게 했다”고 말했다.
<석보상절>은 한글 창제 후 지어진 최초의 산문 작품인 동시에 한국 최초의 한글 불전이다. 김 교수는 “이 불전은 조선 초기의 불교를 조직화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불교학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며 “처음엔 한문으로 지어졌으나, 거기에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관련된 그림이 추가된 후, 다시 일반인들의 불교 이해를 돕기 위해 한글로 다시 번역됐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세종은 통설과는 달리 재위 초기부터 호불적 태도를 갖고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세종의 불교관 형성에 미친 인사들은 왕실 가족, 승려 및 호불 유학자들이었다.
김종명 교수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은 승려가 됐으며 세종의 아들들인 수양ㆍ양평대군은 세종의 불교 신앙 형성에 기여한 데 대해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고 말했다.
수양대군은 “석씨의 도가 공자의 도보다 나은 것은 단지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옛 유학자들이 ‘불교에는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없다’고 했으나 이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말한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불교를 높게 평가했다.
<세종실록>에 나타난 세종의 불교관은 효, 인과, 치병, 정토왕생, 악업제거, 기우 등 공덕과 관련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김 교수는 “세종과 관련된 불전들을 살펴볼 때 세종의 불교관은 공덕 중심으로 나타난다. 한 가지 이유는 세종 치세 후기의 가족사 때문으로 생각된다”며 “세종은 그의 왕후와 아들들이 죽자, 정신적 안정을 위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도움으로 궁전 옆에 사찰을 세웠다. 세종은 또한 그의 불사에 관한 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세종의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은 민생해결과 소통을 통한 교화에 최선을 기울이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불전들도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출판 또는 번역케 한 것이 그 예다.
또한 세종은 죽은 소헌 왕후를 위해 불경을 금자(金字)로 쓰게 하고, 불당을 짓기 위해 수천 명의 인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특히 병과 관련된 불사가 많았다. 김 연구원은 “세종 스스로와 세자의 치병을 위한 행사들이 많았다. 세종은 자신이 아플 때 관리들로 하여금 불당과 사찰에서 기도를 드리게 했고 관리들로 하여금 불전의 경문과 발문을 쓰게 하며 궁궐 내에서는 채식을 하게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세종의 불사는 공공성을 띠고 있었으나 그의 불사에 대한 유신들의 저항 또한 거세었다. 김 교수는 “자신의 불사에 대한 유신 세력들의 반대에 저항하기 위해 △세자에게 왕권을 넘기려는 시도 △거처 옮기기 △불사에 반대하는 관리 파면 등의 통제를 시도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김종명 교수는 “세종의 불교관은 유교 사회에서 그의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종의 치세 마지막까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실천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