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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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법화사상, 삼국 화합의 바탕”
전라남도불교협회 회장 시몽 스님 인터뷰


“장보고의 해상활동에 근간이었던 ‘법화사상’은 한반도를 비롯한 한ㆍ중ㆍ일 삼국이 화합의 길로 나아가는 바탕입니다.”

6월 21~24일 한ㆍ중ㆍ일 문화교류행사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한 시몽 스님(전라남도불교협회 회장, 백양사 주지)은 장보고의 ‘법화사상’에 주목했다. 시몽 스님은 “해신 장보고는 대륙을 제패한 징기스칸과 견줄 만한 인물이다. 그의 활동상과 사상은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관문에 위치한 한반도의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며 “장보고의 ‘회삼승귀일승(會三乘歸一乘)’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보고가 삼국의 문화 및 경제발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데는 불교와 경제협력을 이끌어 낸 업적이 높이 평가된다. 시몽 스님은 “장보고는 법화사상, 관세음보살 신앙을 바탕으로 해양 교역활동을 성공적으로 펼친 인물이다”며 “1200년이 지난 지금도 한ㆍ중ㆍ일이 법화사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삼국이 장보고의 정신을 계승한다면 경제, 문화, 정치적으로 민간차원의 공유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몽 스님은 장보고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제주도 법화사 주지를 지냈다. 법화사 주지를 지내면서 장보고에 관심을 갖게 된 스님은 ‘장보고의 법화사상과 관음신앙’ 등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제주도에서 법화사 폐사지 발굴을 17년간 사업을 전개했다. 스님은 “장보고는 신라 유학승을 지원한 것은 물론 불교발전을 위해 애쓴 인물이다. 장보고의 정신 계승으로 삼국의 불교문화교류 등을 위해 종단차원의 사업 전개도 추진 중이다”고 밝혔다.



<장보고는?>
장보고는 완도의 한 어촌 마을에서 790년 경 태어난 평민이었다. 신라사회의 혼란과 골품제도의 모순을 경험한 장보고는 20대 초반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는 30세를 전후해 당나라에서 연대장급에 속하는 지위에 오르게 된다.
당에 있던 장보고는 신라 근해에 해적이 출몰해 신라인을 노예로 잡아가는 것을 보고 해적 소탕을 흥덕왕에게 건의하게 된다. 이때 청해(오늘날의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1년 만에 노예무역을 근절시켰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신라ㆍ당ㆍ일본을 비롯한 이슬람 상인들이 거쳐 오는 인도항로를 연결시키며 장보고 선단은 세계최초의 종합무역상사로 자리매김하면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중일 삼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해상왕 장보고 당나라 유학승, 일본 유학승 적극 지원

해신, 해상왕, 무역왕 등으로 불리던 장보고는 바다개척을 통한 경제적인 활동과 함께 삼국의 불교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보고는 상품 교역 외에 선박 대여, 통역 제공, 사절단 안내 등의 역할을 하며 돈을 많이 벌어 신라 선승의 당나라 유학과 귀국을 지원했다. 특히 그의 지원은 통일신라 구산선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신라에 최초로 남종선을 전한 도의(道義, 821)가 귀국한 뒤 5~6년이 지나 당나라에서 수학한 홍척, 혜철, 혜소, 현욱, 도윤, 범일, 무염 등의 선승들이 홍주종의 선법을 계승한 뒤에 귀국해 전국 각지에 독자적인 산문인 구산선문(九山禪門)을 개창했다. 820~840년대는 장보고의 전성기로 통일신라에 구산선문을 세운 당나라 유학승들이 당나라에서 모두 귀국한 시점이다. 당시 유학승들의 입당과 귀국은 청해진(완도)대사 장보고 군선들이 도맡고 있어 구산선문을 개창한 조사들은 장보고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또 일본의 대 중국 사절단도 장보고 선단의 선박을 이용해 구법승이나 상인들의 왕래에도 선단의 배를 이용하거나 안내를 받았다. 일본 원인(圓仁) 스님의 일기형식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저는 생전에 직접 각하(장보고)를 뵈옵는 영광을 갖지 못하였습니다만 각하의 위대함은 전부터 들어왔기에 저의 흠모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삼가 엎드려 바라옵건데 대사의 존체가 평안하시기를 빕니다”라며 장보고에게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장보고는 자신이 가는 곳곳에 법화사상을 기본으로 하는 사찰 중창불사에 앞장섰다. 그가 세운 중국 산동성 적산에 법화원을 세우고 절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다. 현대로 말하자면 한인타운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산동성 일대 재당 신라인들이 모여 정보를 교류하고, 추석이면 이곳에 모여 장구를 치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명절을 지내는 등 동포 간 마음을 위로한 안식처의 역할도 했다.
특히 법화경의 중심 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을 통해 이질적, 이국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일심동체의 화합심 고취하기도 했다. 단순한 무역 요충지를 뛰어넘어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려는 관음신앙을 실천한 것이다.

장보고는 엄청난 경제력을 바탕으로 불교를 적극 후원했음은 물론 자신도 관음신앙을 근간으로 무역활동을 펼쳤다. 장보고는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으로 법화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법화사상의 중심은 관음신앙으로 뱃사람에게는 파도를 진정시켜 항해 안전을 지켜주는 자비의 보살로 여겨져 왔다.

또한 불교를 통해 국내외 인적 네트워크 구성에 도움을 받았다. 구산 선승들은 신라 상류층과 네트워크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만큼 그도 도움을 받으며 신라의 각계각층에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장보고는 중국 산동성 적산 법화원 외에 전남 완도와 제주도에 법화사를 지었다. 최근에는 제주도 법화사(주지 도현), 완도 신흥사(주지 법일) 등을 중심으로 장보고 유적 발굴, 기념사업과 문화교류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상언 기자 | un82@buddhapia.com
2010-06-25 오후 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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