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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건 등으로 남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북한의 금강산 관광지구 내 자산동결 조치 등으로 남북 경제교류가 끊겼고, 10년 전 6ㆍ15남북공동선언으로 다짐했던 민족화해와 협력은 휴전선에 세워진 대북선전용 확성기와 이를 “조준격파하겠다”는 북측의 입장발표로 무색해졌다.
동족간 피 흘리며 고통을 겪던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주년. 동족 간 비극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전쟁 위기설까지 흘러나오는 때, 한반도와 같은 분단국 운명이었으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룬 나라의 사례를 살피는 자리가 마련됐다.
평화재단 평화연구원(원장 윤여준)과 독일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6월 23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분단국의 통일과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준비할 것인가’를 주제로 ‘2010 평화재단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행사에서는 율리히 블럼 독일 할레대학 경제연구소 소장이 ‘(서독) 통일 당시 경제적 부담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가’를, 라스 헨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예루살렘사무소 소장이 ‘(동독) 동독주민이 조기통일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를, 알-키브시 예멘 사나대 부총장이 ‘(예멘) 합의에 의한 통일이 왜 내전으로 이어졌나’를, 응우이엔 반 칸 베트남 하노이 국가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 학장이 ‘(베트남)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이 불가능했나’를 발표했다.
토론자로는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이영훈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차장, 김병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 연구교수, 박정원 국민대 교수, 홍성민 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조재현 한국외대 교수가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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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대한 갈망이 부른 독일 통일
독일의 통일은 서독이 ‘동방정책’ 등을 통해 우월한 경제력으로 이룬 흡수 통일이다.
독일 분단은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을 미국, 영국 등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인 舊 소련이 이권다툼 하는 과정에서 비롯됐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민주ㆍ공산 체제의 차이로 대립하고 있었다가 2차대전을 구실로 연합했다. 종전에 이르자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시 대립했고 이 과정에서 독일 수도였던 베를린을 비롯해 독일은 반으로 갈라지게 됐다.
한반도의 분단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소련ㆍ중국 등에 의한 세력확장의 희생양이긴 해도 세계대전이 아닌 남과 북이 직접 동족간 전쟁을 벌인 결과라는 점은 다르다.
독일의 통일은 단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급작스런 통일은 막대한 통일 비용과 ‘오씨-베씨 갈등’ 같은 통일후유증을 초래했다. ‘오씨-베씨 갈등’은 가난한 오씨(Ossis)와 거만한 베씨(Wessi)를 뜻한다. 통일 독일의 부작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율리히 블럼 소장은 “독일 통일은 준비는 부족했어도 통일 이후 집약적인 통합을 이뤄낸 경우이다”라고 말했다.
블룸 소장은 “한국이 통일을 이루려면 더 많은 경제지대의 창출, R&D의 안정화, 재산규제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한국은 독일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라스 헨젤 박사는 “동독주민들이 갖고 있던 통일에 대한 동기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며 “대다수 동독주민은 그들이 원하는 자유가 통일이 돼야지만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남북한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북한주민들이 남한사회를 갈망하도록 남한사회 내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확립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확립돼야 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통일에의 국민적 합의가 이뤄낸 예멘 통일
예멘의 통일은 서로 다른 체제의 남ㆍ북 예멘이 상호 합의에 의해 평화적으로 이룬 협의 통일이다.
‘예멘아랍공화국’(북예멘)과 ‘예멘인민민주공화국’(남예멘)은 1990년 5월 22일 통합을 선언하고 ‘예멘공화국’을 수립했다.
예멘은 아라비아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아랍국가이다. 북예멘은 16세기 터키의 지배하에서 1918년 독립해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됐다. 남예멘은 터키 지배에 이어 19세기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1967년 영국으로부터 해방됐지만 이로 인해 사회주의체제가 자리 잡으며 아랍에서는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됐다.
남북예멘은 1989년 11월 30일 통일헌법초안에 조인했고 1년 후 통일준비단계를 거쳐 완전 통합에 이르기로 합의했다. 양국 국회는 당초 예정보다 6개월 앞당겨 1990년 5월 22일 통일헌법을 승인하고 통합을 선언했다. 조기 통일은 통일반대자들에 대한 선제조치였다. 또 동독의 경우처럼 남예멘에서 줄이었던 국민 탈출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알-키브시 예멘 사나대학 총장은 “예멘이 통일에 앞서 국민투표와 국회선거를 하지 않았던 것은 모든 예멘인이 통일이 예멘의 발전의 수단임을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알-키브시 총장은 “전쟁과 무력경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없다. 한국의 통일 역시 예멘처럼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정원 국민대 교수는 “남북예멘의 정치군사적 통합과 함께 행정체제ㆍ화폐 및 경제ㆍ정서적 통합 등에서 예상되는 과도기적 상황을 예측한 법제도적 장치는 통일을 주는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말했다.
#민족 분열이 이념ㆍ무력에 지배당한 베트남 통일
베트남의 통일은 1975년 4월 무력에 의한 강제 흡수 통일이었다.
베트남의 무력통일은 후진국의 전형적인 내분과 분열ㆍ대결, 공산주의 폭력혁명에 의한 강제통합을 상징한다.
베트남도 다른 분단국들과 마찬가지로 외압에 의해 분단됐다. 한반도의 분단과 유사한 이념과 체제가 원인이 된 분단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민족 내부 결속에 실패하고 민족간 분열과 대결이 거듭됐다. 이어진 내분은 결국 공산주의 폭력혁명노선에 의해 흡수 통합됐다.
응우이엔 반 칸 베트남 하노이 국가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 학장은 “베트남에서는 어떤 ‘의도적 전쟁’이나 ‘이념적 전쟁’은 없었다. 단지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침략이 있었고 베트남 국민의 반미 투쟁이 있었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응우이엔 학장은 “통일을 위해서는 확고한 목표와 적절한 단계와 해결책을 지녀야 한다”면서 “통일을 위한 투쟁은 국민의 뜻과 바람에 의해 평화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응우이엔 학장은 “국가의 통일은 한 국가의 내부적 책임이고 그 국가의 국민들이 결정하는 일”이라며 “한 국가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분단세력을 차단하는 것이 우선이다”라고 말했다.
조재현 한국외대 교수는 “베트남의 분단과 통일은 강대국의 자국이익우선주의가 한 국가의 분단과 통일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박정원 교수는 “베트남의 통일은 전쟁의 승리를 통해 분단을 극복한 사례로서 이른바 힘에 의한 흡수통일이었다”면서 “1980년대 공산체제의 베트남이 서방국가의 지원제도를 인정한 경제개혁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분단국의 통일, 국가발전 결과 낳아
종합토론에서 조재현 교수는 “독일, 예멘, 베트남 3국이 각각 통일에 다른 특징을 보인다”면서 “베트남의 경우 공산세력이 2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고서도 결국 분단으로 치달은 것에는 강대국 때문이었다. 한국의 통일문제도 강대국과의 관계를 충분히 감안하면서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공간적인 통일보다 정서적인 민족 통합ㆍ재사회화과정에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성민 연구교수도 “남북한 통일 연구가 많지만 정치ㆍ경제적인 연구가 대부분이다. 민족ㆍ역사문제에 대한 고민이 적다”고 지적했다.
박정원 교수는 “독일과 예멘은 서로간 합의를 준수해 통일에 이를 수 있었다”면서 “한국은 7ㆍ4남북공동선언, 6ㆍ15공동선언 등이 있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통일로 나아가려면 기본합의부터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무력 통일된 베트남과 흡수 통일된 독일 등 사례가 보여주듯이 분단국의 통일은 경제든 군사력이든 세력이 큰 축이 주도해왔다”면서 “통일과 별도로 국민 통합에도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콜린 뒤르코프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한국사무소 소장은 여는말을 통해 “한국의 통일에 값비싼 대가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결국 성공적일 것이라는 것에는 한 치의 의심이 없을 것”이라면서 “갑자기,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이뤄질 수 있는 통일에 한국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여준 평화재단 평화연구원 원장은 인사말에서 “남북한이 군사적 충돌을 향해 치닫는 긴박한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모든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분단 자체에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통일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