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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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의 요체는 끊임없는 문답과 점검”
박영재 엮음, <삶과 수행은 둘이 아니네>


최근 간화선의 대중적인 확대를 위한 노력은 선문답과 지도점검의 체계 확립으로 이뤄지고 있다.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 특별한 경험이나 장애에 부딪쳤을 때 지도점검을 해주는 선지식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간화선을 전통 수행법으로 하는 대부분의 선원장 스님들은 ‘문답과 점검’이 간화선 대중화의 전제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혹자는 오늘날 간화선이 쇠퇴일로를 걷고 있는 이유는 이러한 ‘문답과 점검’의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매년 수많은 불자들이 수행에 매진하기 위해 각 단체들을 찾지만 ‘문답과 점검’의 부재로 정작 간화선의 참 의미를 알고 이를 다지게 되는 이는 드물다는 것이다.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가 지도법사로 활동하고 있는 선도성찰나눔실천회(이하 선도회)는 간화선의 쇠퇴라는 세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간화선 수행을 40년이 넘게 이어오고 있는 재가 수행 단체다. 특히 선도회는 ‘입실(入室) 지도’라는 전통을 이어 눈길을 끈다.

입실지도는 제자가 스승과 일대일로 만나 끊임없이 수행력을 점검받는 것이다. 매주 토요일 선도회 법회에서 초보자들은 수식관 등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기초수행부터 지도받지만, 구참자들은 무문 혜개 선사의 <무문관>(無門關) 제창을 시작으로 48칙(則)을 화두로 들며 체험한 경계를 박영재 교수에게 점검받는다.

이러한 전통은 1965년 선도회를 조직한 종달 이희익 거사의 가르침에서 나왔다. 선도회 1대 지도법사인 종달 이희익 거사는 현재 재가 수행이 있게 한 기반을 닦은 재가선사다.

<삶과 수행은 둘이 아니네>는 1990년 입적한 종달 이희익 거사의 20주기를 기리며 그 가르침을 담고 있다. 종달 이희익 거사는 세 스승에게 귀의하기(귀의삼사 歸依三師), 지속적으로 입실점검 받기(입실점검 入室點檢), 잠깐 앉은 힘으로 온 하루 부리기(좌일주칠 坐一走七)를 핵심 수행가풍으로 세웠다. 여기서 세 스승은 부처님과 공안집 무문혜개 선사, 그리고 종달 이희익 거사다.

책은 이러한 핵심 수행 가풍을 총 3부로 구성해 전한다. 1부에는 종달 이희익 거사의 일대기와 선도회의 성립과정, 선도회 간화선의 요체, 10년간 선도회 활동과 언론자료 등을 실었다. 2부에는 선도회 문하생들의 수행 수기, 3부는 종달 이희익 노사가 저술한 한국선에 관한 16권의 책에 대한 소개와 그 요지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박영재 교수는 종달 이희익 거사의 치열하고 섬세한 수행지도 열정을 ‘화장실 입실점검’ 일화로 소개한다. 1983년 서울 화신백화점 근처 시민선방을 맡게 된 종달 이희익 거사가 입실점검 할 공간이 따로 없자,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 사람들을 공부점검한 일화다. 이 밖에 종달 이희익 거사는 입적하기 전 급격히 몸이 쇠약해 가는 가운데서도 누워서 까지 입실점검에 온 힘을 쏟았다.

“스승님이 몸을 가누시기 어려울 정도로 노쇠해 가셨다. 병중이신데도 토요일 입실 받으시는 것만은 거르지 않으셨다. 불편한 몸을 겨우 가누시면서 우리를 지도하느라 입실을 받으시는 모습은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스승님은 말씀하시기가 불편해지자 벽에 기대앉아 손가락 끝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주셨다. 우리는 스승님의 마지막 순간의 모습까지도 말씀없는 법문으로 새기면서 스승님의 임종을 맞았다.”

제자들에게 종달 이희익 거사가 남긴 마지막 모습에 대한 회고는 재가불자들의 수행선풍 진작에 대한 거사의 큰 원력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삶과 수행은 둘이 아니네│박영재 엮음│본북 펴냄│1만 6000원



■종달 이희익 거사는?
1905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종달 이희익 거사는 함흥 제일공립 보통학교를 졸업,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경 일본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종달 이희익 거사가 불문에 입문한 것은 귀국 후 잡지 <조선불교>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종달 이희익 거사는 조선불교재단의 상무이사였던 삼소(三笑) 나까무라 선생의 권유로 일본 임제종 남선승당(南禪僧堂) 소속의 화산(華山) 노사 문하에 입문하게 된다. 종달(宗達)이란 법명을 받은 거사는 화산 노사 문하에서 8년 동안 조석(朝夕)으로 입실하며 참선 수행했다.

이후 남선승당에서 일본 임제종 최대파인 묘심사파(妙心寺派)의 ‘한국개교사(韓國開敎師)’는 사령장을 받았다. 하지만 여러 다른 노사들을 찾아 탁마를 하며 9년간 수행을 계속해 온 거사는 해방을 맞이하며 한국으로 건너온다.

한국 불교계가 일본 임제종 선맥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거사는 재가자로 문서포교에 뛰어들었다. 거사는 <대한불교>(현 불교신문) 창간에도 깊이 관여 했으며 선전문지 <법시>, <선문화> 등 발간을 통해 불교언론 저변확대에 나섰다.

불교잡지를 발행하며 재가자들을 직접 지도하던 거사는 어느 날 이창훈이란 청년이 좌선을 지도해 달라고 찾아오며 원력을 세운다. ‘무(無)’자 공안(公案)을 참구해 보라고 준 이 청년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침에 찾아와 입실을 하는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일반인을 위한 참선 지도를 시작한다.

거사는 1963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었던 효봉 스님에게 ‘조계종 포교사’로도 임명받으며 조계사 법당 등에서도 재가자 참선지도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점점 늘자 거사는 이들과 함께 1965년 선도회를 조직해 재가선풍 확산에 앞장섰다.

거사의 열정은 문하생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문하생인 조선대 김인경 교수는 30초에서 1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입실점검을 받기 위해 여러 해 매주 비행기를 타고 상경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치열한 구도열은 문하생들이 오늘날 제주도에서도 입실하러 오는 등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현재 선도회는 서울 목동, 정릉, 서강대, 인천, 대전, 광주 등 11개 지부 모임에서 200여 회원들이 정진하고 있으며 서강대 박형상, 박성호 서명원 교수 등 가톨릭 신자ㆍ신부 등이 참선모임을 이끌고 있는 등 그동안 인가를 받은 지도법사는 종교를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다.
노덕현 기자 | Dhavala@buddhapia.com
2010-06-18 오전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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