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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때 부석사가 떠올랐는지. 부석사의 당간지주 앞에서 무량수전까지 걸어보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절집이 대개 산 속에 있게 마련인데 부석사는 산등성이에 있다고 했다. 문득 뒤돌아보면 능선 뒤의 능선 또 능선 뒤의 능선이 펼쳐져 그 의젓한 아름다움을 보고 오면 한 계절은 사람들 속에서 시달릴 힘이 생긴다고 했다.”
신경숙(1963~)의 단편 ‘부석사(2001 이상문학상 대상)’에서 여자 주인공 ‘그녀’는 남자 주인공 ‘그’에게 1월 1일 부석사에 함께 가자고 한다. 각자 실연(失戀)의 아픔을 견디고 있는 그녀와 그는 새해 첫 날 차가운 바람을 뚫고 부석사를 향해 간다.
그녀와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여전히 아름다운 간격으로 서있고, 그 안에 변치 않는 무량수불의 눈빛이 순간과 영원을 오가고 있었다. 부석사는 당나라 낭자 선묘가 연모했던 의상 스님이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세운 절이다. 선묘는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유학을 마치고 당나라를 떠나는 의상 스님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선묘는 사람의 몸을 버리고 용이 되어 스님을 따라온다. 용이 된 선묘는 불사를 방해하는 무리들로부터 스님을 지켰고 스님은 부석사를 세울 수 있었다. 그 때 선묘는 바위를 들어 올려 그 무리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무량수전 뒤에 있는 그 바위에는 ‘부석(浮石)’이 새겨져 있다. 그녀와 그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이젠 어떡하죠?”
“눈이라도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누군가 지나가겠죠. 우선 추우니까 차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려보죠.”
부석사를 향해 가던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 헤매던 중 차가 진창에 빠져 꼼짝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도 아찔한 낭떠러지 앞에서. 두 사람은 어두워진 차 안에서 상념에 젖는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여자와 결혼해버린 P를, 그는 군대에 있는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간 K를 생각한다.
삼층석탑 뒤편 숲으로 커다란 수리 한 마리가 날아 들어갔다. 작은 새들이 서둘러 숲을 나왔고 파랗게 질린 울음소리가 무량수전 마당으로 뚝뚝 떨어졌다. 국보인 석등 앞에는 부석사의 극락인 안양루가 허공 끝에 걸려 있었다. 그녀와 그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산길 낭떠러지에 어둠이 점점 깊어가고 있을 때 그녀는 희미한 범종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찾지 못한 부석사가 바로 근처에 있는 건가.” 종소리가 눈발 속의 골짜기를 거쳐 그들을 에워싼다. “부석사의 포개져있는 두 개의 돌은 정말 닿지 않고 떠있는 것일까.” 그녀는 문득 잠든 그와 자신이 부석처럼 느껴진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자동차 유리창을 덮어버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차 안에서 소설은 끝이 난다. 끝내 소설은 그들에게 부석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신경숙의 ‘부석사’는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랑 뒤에 겪어야 하는 것들을 이야기 한다. 작가는 사랑의 아픔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두 사람을 또 다른 사랑의 가능성 앞에 세운다. 하지만 소설은 끝내 부석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몇 해 전 1월 1일에 부석사에 다녀왔다. 동행했던 사람이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현실 속의 작가는 부석사를 다녀왔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부석사에 이르지 못하고 눈 내리는 소백산 어느 낭떠러지 앞에 서있다. 작가는 “현실의 부석사는 길을 잃을래야 잃을 수도 없지만, 소설 속에서는 아무나 그곳에 가게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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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계절 사람들 속에서 시달릴 힘이 필요한 사람은 부석사를 찾을 일이다. 능선 뒤의 능선 또 능선 뒤의 능선이 펼쳐져있는 그 의젓한 아름다움을 보고 와야 할 일이다. 그리고 길을 잘 찾아야 할 일이다. 아무나 갈 수 없는 절이기 때문이다.
사물(四物)을 울리고 난 사미와 행자가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으로 올라갔다. 저녁예불이다. 안양문으로 저녁 해가 따라 들고, 극락문을 건너간 사미와 행자의 그림자가 안양루를 기웃거렸다. 그녀와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