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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에 버금가는 역량, 수행력, 원력, 자비심을 지닌 분이 새 이사장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됐으니 어깨가 무겁고 버겁고, 부끄럽습니다. 부처님과 법정 스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맑고 향기롭게 이끌어 가겠습니다.”
법정 스님의 평생 원력이 담긴 시민단체 맑고향기롭게 제2대 이사장에 덕현 스님이 5월 16일 선임됐다.
6월 2일 지방선거날 오후 길상사를 찾은 이들로 경내는 약간 들떠있었다. 북적이는 도량을 지나 찾아간 스님의 처소는 신기하게도 고요했다. 덕현 스님께 인사를 드리자 2개의 알람이 하나씩 울렸다. 약속시간을 알리는 알람이었다. 쉴 틈 없이 약속이 잡힌 스님은 아직 투표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님 처소에는 법정 스님의 대나무 침대를 연상시키는 침구와 책, 다구, 법정 스님의 사진 등으로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치열하다 싶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스님은 차분했다.
“내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세상이 다 청정하다(一心淸淨故 法界淸淨)는 가르침대로 사람들이 지혜를 밝히는데 힘쓰도록 할 계획입니다. 공동체라는 틀 속에서 한 개인이 베푼 자비와 평화는 자연스럽게 세상을 밝힐 것이기 때문이죠. 모든 사람은 수행자이고, 모든 삶은 하나의 수행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도 목표입니다.”
법정 스님은 입적 전 ‘맑고향기롭게’의 내실 강화를 위해 “ ‘마음’을 닦고 ‘자연’을 보살피는데 힘쓰라”며 구체적 방향까지 설정해줬다.
“법정 스님은 입적 전까지 맑고향기롭게 걱정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길상사가 맑고 향기로운 도량의 구심점으로 모든 것을 담아갈 것을 부탁하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마음ㆍ세상ㆍ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한다는 덕목을 실천하기 위해 맑고향기롭게는 1994년 발족했다. ‘맑고 향기롭게’ 슬로건이 적힌 스티커를 전국에 배포하고, 선수련회, 나눔실천 봉사를 하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에는 법정 스님이 법문을 하면 바로 지역 지부가 출범될 정도로 활기찼지만, 법정 스님은 맑고향기롭게 설립 이후부터 건강이 나빠지셨어요. 사실상 설립 이후부터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답보상태에 머물렀습니다. 앞으로 내실 강화에 힘쓸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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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향기롭게의 모든 활동은 ‘마음’을 닦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 법정 스님의 송광사 수련회를 모델 삼아 템플스테이를 적극 활용하고, 경전과 법정 스님의 사상을 배우고 익히는 자리도 만든다.
지금까지 복지관, 보육시설 방문 봉사, 노숙자ㆍ결식아동을 위한 음식공양, 반찬전달, 전화 말벗 등의 봉사활동 외에 아프리카ㆍ동남아 지역 사찰이나 학교 등으로 활동범위를 확대해 나간다.
내년에는 지장전 뒤 주차장에 맑고향기롭게 구심점 역할을 할 회관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회관 건립은 법정 스님의 오랜 뜻이었다. 회관에는 사찰전문음식점, 스님 추모 공간, 수련공간, 법당, 회의 및 모임 공간 등이 들어설 계획이다.
또 채식 문화를 유도하는 강의ㆍ캠페인과 함께 사찰전문음식점을 운영한다. 음식점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은 맑고향기롭게 운영, 해외 이웃돕기 등에 사용할 계획이다. 또 법정 스님의 추모공간은 따로 만들지 않고 로비 등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스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한다.
맑고향기롭게의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는 스님의 책 출판 중단과 이후의 일이다. 덕현 스님은 “올해까지 책을 판매하고, 이후에는 사이버 공간을 이용할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현재까지 이사회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안은 없다. 출판사와 맑고향기롭게는 지속적으로 의견 조율을 하면서 스님의 유지를 지켜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길상사가 앞으로 맑고 향기로운 사찰로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덕현 스님의 과제다. “스님은 늘 ‘가난한 절’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짜임새 있게 잘 쓰고 낭비하지 않는 선에서 사찰 운영을 하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겠죠.”
알뜰살뜰한 길상사는 현재 재정 투명을 위해 신도회에서 감사를 진행해 신도들의 돈이 함부로 쓰이는 것을 막으며 무소유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하루도 길상사에 머물지 않았던 법정 스님과 달리 덕현 스님은 길상사에서 머물고 있다. 속세 한 복판에서 덕현 스님은 수행을 하는 마음으로 소임에 임하고 있다. “길상사에 있으면 세상과 쉽게 접촉하고 다양한 활동을 보다 폭넓게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진흙에서 맑고 향기로운 연꽃이 피듯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의 갈등을 풀고 사람들의 마음에 맑고 향기로운 연꽃을 피우겠습니다.”
속세에서 연꽃이 되어 맑고 향기로운 가르침을 전할 덕현 스님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