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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상처 보듬어 주소서
5ㆍ18 광주민주항쟁 30주년 기념법회
조계사 합창단이 5ㆍ18 광주민주항쟁 30주년 기념법회 및 추모 위령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역사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80년 광주의 희생과 상처를 보듬어 주옵소서. 나약하고 비굴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자주와 평화 그리고 정의의 역사로 바꿔놓은 숭고한 영령에게 극락왕생의 가피를 내려주옵소서.”

굵은 빗방울이 대지를 적신 5월 18일 서울 조계사. 막 연등축제를 마친 경내에는 축제열기가 한풀 꺾여 있었다. 부처님오신날을 3일 앞두고 있지만 경내는 고요했다. 때 아닌 총성이 들려왔다. 법당을 빠끔히 들여다보던 참새도 파닥 날갯짓을 한다. 영상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조계사 대웅전에서는 1980년 5ㆍ18 광주민주항쟁의 실상을 알리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신도들의 안타까운 탄성이 법당을 가득 채웠다. 흑백 영상에는 군인에 의해 피투성이가 된 시민이 바지 끝을 잡힌 채 끌려가다 내동댕이쳐지고 있었다. 참혹했다.

1980년 5월 29일 광주에서 치러진 합동차례에서 아버지를 잃은 꼬마 상주가 영정에 기대있다.


스님과 신도들의 기도가 이어졌다. ‘자주와 평화, 역사로 바꿔놓은 숭고한 영령’들을 위한 기도였다. 그리고 숭고한 민주주의 정신을 계승할 것을 발원했다.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대한불교청년회, 불교여성개발원, 불교인권위원회, 불교환경연대,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참여불교재가연대, 청정승가를위한대중결사는 ‘5ㆍ18 광주민주항쟁 30주년 기념 법회 및 추모위령재’를 봉행했다.

서울 조계사에서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참여불교재가연대 등 불교계 단체에서 5ㆍ18 민주항쟁 30주년 기념법회 및 추모위령재를 봉행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대표 퇴휴 스님은 “슬픈 부처님오신날이었습니다”며 추모법회를 시작했다.
“민주화가 될 것이라고 희망했습니다. 5ㆍ18 영령의 염원과 민주화 정신이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슬픈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민주화는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민주화 투쟁으로 희생된 영령들이 이룬 것입니다. 사건의 실상이 낱낱이 밝혀져 다가올 5ㆍ18은 슬픔을 되새기는 날이 아닌 민주주의를 이룩한 기념의 날이 돼야겠습니다.”

조계사 주지 토진 스님은 “앞으로의 민주화는 살아있는, 살아갈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또 스님은 “원망은 원망으로 씻어지지 않는다는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영가를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마음의 짐을 털고 싶다”고 고백했다.
이날 정부는 2004년 5ㆍ18기념식부터 공식 추모곡으로 제창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못 부르게 했다. 토진 스님은 “부르지 못하게 하니까 더 부르고 싶어졌다”며 조계사 합창단에게 노래를 청하기도 했다.

광주지역 신행단체는 5월 18일 광주 원각사에서 고 지광 김동수 열사와 희생자 추모법회를 봉행했다.

민주항쟁이 벌어진 광주에서는 해마다 5월이면 가슴이 아려오는 아픔과 가족과 친구를 잃고 살아온 남은자의 슬픔이 더해진다.

광주지역신행단체는 5ㆍ18 당시 격전지에 위치한 광주 원각사에서는 故 지광 김동수 열사 및 희생자 추모 법회를 개최했다. 김동수 열사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조선대 불교학생회 소속으로 대불련 전남지부장으로 활동했다. 5ㆍ18당시 대불련 전남지부장으로 광주지역 봉축위원회 부집행위원장이었다.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하고 있던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칼에 시민군이 무자비하게 짓밟힐 때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에 남아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희생됐다.
법회에는 김동수 열사의 부친 김영석 옹, 모친 김병순 여사가 참석해 희생자에 대한 슬픔을 더했다.

한편, 광주국립 5ㆍ18민주묘지에서 개최된 추모법회에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불참했다. 또 공식 추모곡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하자 광주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5ㆍ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는 정부의 공식 추모식과 별도로 5ㆍ18 구(舊)묘역에서 기념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상임대표 법일)는 16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구 망월묘역)에서 ‘2010 민족민주열사 해원 큰 굿’을 개최했다.


#황주항쟁 겪어낸 연담 스님의 생생한 기억

전 보림사 주지 연담 스님.

“5ㆍ18 당시 같이 활동한 가장 절친했던 도반 진각 스님(이광영, 구례 화엄사 주석)이 계엄군이 쏜 총탄에 척추를 맞아 불구가 돼 처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생 제 마음속의 짐입니다.”

연담 스님(전 보림사 주지) 목소리에는 한이 서려있었다. 벌써 30년의 생활이 지났지만, 스님은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하여 한동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연담스님의 30년 전 5ㆍ18 당시 광주 무등산 증심사 총무 소임을 보고 있었다. 스님은 사찰에서 부처님오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일 한 신도의 아들에게서 광주시내에 대해 생생히 들었다. 스님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연담 스님은 다음날 시내로 나갔다. 광주시내에는 시민들과 군인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스님은 군인들이 시민을 폭행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도우러 온 도반인 진각 스님과 같이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그날 저녁 다시 사찰에 가서 부처님오신날 준비를 했다.

1980년 5월 21일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사찰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모든 교통수단이 움직이지 않았고, 통행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부처님오신날 음식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손수레에 싣고 전남도청으로 나갔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모였다. 계엄군은 시민을 조준 사격했다. 이날 최소 54명이 숨지거나 5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목숨을 위협받은 시민들은 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22일 다음날 기독교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이광영(진각 스님)이 총에 맞아 실려왔다”는 비보가 전했졌다. 병원에서 만난 진각 스님은 “척추에 총을 맞아 불구가 되었으니, 부모에게 짐을 지우지 말고, 증심사에 데려다 달라. 증심사 토굴에 연탄불을 피우고, 천수경 염불을 해달라. 빨리 죽어서 다음 생에는 멋진 중생활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스님은 진각 스님을 부모님에게 보내야 했다. 그리고 스님은 다시 시내에서 시민군 활동을 했다.
연담 스님은 광주민중항쟁때 도청 앞 분수대에 올라 연설한 것이 시민 선동죄가 돼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1980년 10ㆍ27법난으로 운악산 봉선사에서 군인들에게 끌려가다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전 동국대학교 역경원 원장)과 주지 인묵 스님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 후 스님은 서울로 상경해 1984년 중앙포교연구회를 조직하였고, 서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85년 민중불교운동연합이 창립되어 이념교육분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86년 정토구현전국승가회 사무국장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관련 국민운동본부 불교계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상언 기자ㆍ양행선 광주전남지사장 | un82@buddhapia.com
2010-05-20 오후 9: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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