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게 옥에 갇힌 예순 넷의 화가는 차가운 감방에서 간장을 찍어 화장지에 그림을 그린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굵은 이름을 새기고 우리의 그림을 세계에 알린 그는 프랑스 파리에 잠들어 있다. 어린 시절 덕숭산과 수덕사의 풍경을 그리며 화가의 꿈을 꾸었던 고암(顧菴) 이응노(1904~198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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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6일 예산 수덕사에 ‘수덕사 선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고암 이응노를 기리기 위한 미술관이다. 미술관은 그가 머물던 절 입구 수덕여관 옆에 세워졌다. 미술관 옆 절, 수덕사로 오르는 길에는 꽃과 연등이 봄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경허, 만공’만으로도 가풍과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수덕사는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이 남아있지 않다. 백제 위덕왕(554~597)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 년여의 옥살이를 끝내고 세상으로 돌아온 그는 수덕사로 간다. 한지와 먹, 그리고 우리의 붓을 들고 세계로 나갔던 그는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뜻하지 않은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주위의 꾸준한 탄원으로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한 동안 살았던 수덕여관은 옛 모습 그대로 주인을 따뜻하게 맞아준다.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세상으로 버려졌던 영혼은 개울가 너럭바위 위에 앉아 끝없이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바위에 그림을 그린다. 지금도 그 바위는 수덕여관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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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년 묵은 법당 앞마당엔 오색 연등이 이응노의 한지 콜라주처럼 허공에 붙어있다. 한국을 넘어 유럽에 자신과 ‘우리’를 알린 이응노의 그림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그야말로 이응노만이 할 수 있는 우리의 그림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영감을 얻은 그의 대표작 ‘군상’은 먹 하나로 그린 그림이지만 백가지 색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먹’의 세계를 보여준다. 한 장의 그림은 수 백 장의 그림을 동시에 보는 것 같고, 그림인 듯 문자인 듯 경계를 허무는 추상은 예술본색이다.
그렇게 우리의 것으로 유럽을 사로잡고 세계를 매료시킨 노년의 한 한국 화가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는다. 백건우 윤정희 납치미수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작품은 국내에서 발표와 매매가 금지된다. 이유는 ‘빨간색’이라는 것이었다. 여든이 다 된 그는 한국 국적을 포기한다. 그는 프랑스인으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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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예불이다. 법고 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연등 콜라주와 함께 퍼포먼스를 펼치는 듯 했다. 대중들이 연등을 헤치며 법당으로 가고, 저녁 해는 법당 문살을 적신다. 미술관 옆 절, 수덕사의 대웅전은 단청 하나 없이도 충분한 빛깔이었다. 누구의 ‘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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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 서울 호암미술관에서 이응노의 전시회가 열렸다. 서울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던 그 날, 이응노는 프랑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그리고 이튿날 세상과 영원히 이별한다. 여든여섯 살, 생일을 이틀 앞두고 그는 또 한 번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나갔다.
수덕사를 찾는다면 수덕여관에 들를 일이다. 너럭바위 위에 앉아볼 일이다. 한 영혼이 힘겨운 시간 뒤에 찾아와 머물던 아랫목이다. 누군가의 지나간 흔적을 느껴보는 것은 영혼을 가지고 사는 동안에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목탁 소리 예불문 소리에 도량이 젖어갔다. 너럭바위 위로 딱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