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는 일제 정책에 의해 분리ㆍ통제돼 가면서 근대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자주적 노력이 어려웠던 반면, 일본 불교는 메이지 정부의 국가주도 근대화에 동조하는 주류 보수의 한편으로 근대적 각성에 의한 혁신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펼치고자 했던 용성 스님과 키요자와 스님의 불교사상도 달랐지만 각각 자신이 세운 ‘원형(原形)’에의 의지를 갖고 불교의 근대적 상황에 대응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조승미 동국대 외래교수는 최근 <불교연구> 제32집(한국불교연구원 刊)에서 기고논문 ‘‘원형’에의 의지와 동아시아 근대불교’를 통해 백용성과 키요자와 만시의 사상을 조명했다.
조승미 외래교수는 “백용성은 자각을 중시하는 임제선종(禪宗)으로의 귀원(歸源)을 위해 원형적 의지가 담긴 불교개혁 운동과 활동을 전개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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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한 용성 스님은 선수행과 승단 내 선풍진작을 위한 활동으로 생애를 보냈다. 조 외래교수는 “용성 스님은 40세에 지리산 상비로암과 보개산 성주암등에서 선회(禪會)를 열기 시작해 전국에 많은 선회와 선원을 개설했다”고 설명했다.
용성 스님은 개신교에 대한 대응을 목적으로 1910년 <귀원정종(歸源正宗)>을 발간하고 이듬해 서울로 상경했다. 조승미 외래교수는 “개신교와의 경쟁과 갈등이 용성 스님이 처음 접한 종교의 근대적 상황이었다. 용성 스님이 ‘우리 불교에서는 각황사 하나만이 있을 뿐이고 더욱 우리 선종에서는 한 사람도 선전함이 없음’이라고 말한 것은 스님이 불교와 선종을 구분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조 외래교수는 “‘매일신보’에 용성 스님이 기고한 ‘조선에서 법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오직 임제 뿐, 우리들은 임제선종이다’라는 글을 볼 때 그는 조선불교의 정체성은 ‘임제종’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고 해석했다.
용성 스님은 참선 포교활동도 지속했다. 특히 재가 여성들에게 직접 참선지도 한 것이 확인돼 주목된다. 조승미 외래교수는 “1918년에 설립된 무주부인선회가 그것인데, 용성 스님은 서울에 주석하면서 한 번씩 내려와 이 선회를 지도했다고 하니, 그가 참선을 대중화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며 “근대 시기에 재가여성들이 참선수행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에는 용성의 공이 매우 컸다. 승단에 선회와 선원을 설립해 온 그가 일반인들로 그 범위를 확대한 것은 분명 전근대적인 불교문화를 깨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근대 일본불교에서 키요자와 만시가 활동하던 메이지 말기는 전(前) 세대 불교가 보여준 호법ㆍ호국의식 강조나 서구화 물결에 대응하기 위한 계몽주의 운동에서의 탈피가 시작됐던 시기였다.
조 외래교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짧은 인생을 살았던 키요자와는 순수함을 유지한 채로 ‘정신주의 운동’이라는 새로우면서도 강한 원형지향의 종교실험을 시도했다”고 주장했다.
키요자와는 절대 타력인 정토진종의 ‘신란(親鸞)사상’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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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요자와 만시는 정토진종(淨土眞宗) 오타니(大谷)파 승적을 갖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는 종단의 지원을 받아 동경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에서는 헤겔과 칸트 등의 서양철학을 배우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키요자와는 1888년 종단으로부터 심상중학교 교장의 임명을 받고 종단 소속 사찰의 키요자와가(淸澤家)의 딸과 결혼해 성(姓)을 바꿨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그는 교장직을 사임하고 금욕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조승미 외래교수는 “키요자와는 부인을 고향으로 보내고 금연을 하고 육식을 금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종교수행을 했다. 교장직에 있을 때는 교수와 학생 모두 양복을 승복으로 바꿀것을 지시했는데 재가종단인 정토진종의 세속화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병을 얻어 요양생활을 했던 키요자와는 ‘절대 타력(他力)이라는 진종신앙의 원형을 체험하면서 현실 종단 개혁운동과 정신주의(精神主義)운동에 나섰다.
조 외래교수는 “키요자와는 1901년 잡지 ‘정신계’를 발간해 정신주의를 제창한다. 여기서 그는 절대무한의 여래(如來)에 전적으로 의존해 정신이 발달하는 정신주의는 다름 아닌 ‘타력신앙’이다”라고 설명했다.
조승미 외래교수는 철저한 타력을 말하는 그의 신념은 정토진종의 창시자인 신란의 가르침을 기록한 <탄이초(歎異抄)> <아함경>,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인 <에피크테토스(Epictectus)의 어록> 등에 의존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는 “키요자와가 불교의 원형으로서 초기경전을 중시한 것은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며 서양철학서를 포함시킨 것은 그의 신앙이 불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며 “그는 진종 종조 신란의 타력신앙의 진수를 밝힌 문헌인 <탄이초>에서 자력을 비판하고 절대타력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백용성과 키요자와의 불교개혁에는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보여준 불교운동 전개방식과 그 성격에는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우선 이들 모두 ‘승려본연’의 자세를 강조한 점이다.
조 외래교수는 “용성은 대처식육을 지적하며 계율준수를 가장 근본으로 여겼으며, 키요자와는 스스로 엄격한 금욕생활을 시도하거나 세속화된 종단 교육풍토를 전통적인 것으로 바꾸고자 했다”며 “또 이 둘은 모두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독자적인 종교실험을 시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