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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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왕실 출가녀는 불교 수호자”
황인규 교수 한국불교학회 학술대회서 발표
청룡사 내 정업원 비각.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불교를 억압하는 시책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숭유억불로 표현되던 조선시대 동안 불교는 도심지에서 산중으로 들어가게 되는 ‘산중불교시대’였다. 산중불교시대에도 도성에서의 왕실불교가 없어진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특히 왕실녀들의 적지 않은 불교신행활동이 그러했다.

황인규 동국대 교수는 한국불교학회(회장 김선근)가 4월 10일 개최한 제51회 전국불교학술대회에서 ‘조선전기 왕실녀의 가계와 비구니 출가’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황인규 교수는 “조선시대의 왕실녀 출신의 비구니들은 정업원과 후궁을 중심으로 왕실불교의 주축을 이루면서 조선불교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고, 그로 인해 성리학적 예제(禮制)가 조선중기이후에야 정착되게 됐다”고 주장했다.
황인규 교수는 “조선전기에는 왕후, 후궁, 공주, 왕자군의 부인들이 정업원에 출가하거나 후궁에 머물면서 신행활동은 암암리에 이루어졌다”며 “국가시책과는 달리 사후의 세계에 대한 추념을 불교가 담당했기 때문에 능침(陵寢) 사찰의 운용과 더불어 도성 궁궐에서도 정업원과 인수궁ㆍ자수궁 등의 후궁에서는 왕실녀의 불교신행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조선전기에 걸쳐 나타난 왕실녀의 비구니 출가를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정종ㆍ세종ㆍ성종대로 구분해 각 시대의 비구니출가 사실을 조명했다.

태조 이성계의 셋재 딸인 경순공주(?~1407)는 1392년 개국공신 흥안군 이제에게 출가했다. 이제는 개국원훈으로 전주 이씨 성을 하사받는 등 공주의 부마로 예우를 받지만 태조 7년인 1398년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공주의 어머니 신덕왕후가 죽은 지 2년 후의 일이었다.
황인규 교수는 “당시 공주는 몇 년 사이에 어머니와 두 동생ㆍ남편의 잇따른 죽음을 지켜봐야했고 그 직후 출가해 비구니가 됐다”며 “경순공주의 비구니 출가는 올케 의안대군 방석 처 심씨의 출가와 더불어 조선 건국 초 왕실녀 가운데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황 교수는 “정치적 암투에서 사랑하는 막내딸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부득이한 태조의 조처였을 것이며, 태조의 불교신행과 그 시책의 일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해석했다.

왕실녀의 비구니 출가와 더불어 후궁들의 출가는 태종이후 조선중기 무렵까지 왕의 사후에 계속됐다.
후궁의 비구니 출가가 처음 나타난 것은 태종의 임종 직후부터다.
황 교수는 “세종 4년인 1422년 태종이 죽자 이를 비관한 후궁들은 세종에게도 고하지 않고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됐다. 다른 후궁들도 이를 본받아 앞을 다투어 머리를 깎았다”며 “태종의 후궁 9명 중 출가한 비구니는 3명 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세종(1297~1450)이 임종한 후에는 후궁 10여 명이 한꺼번에 비구니로 출가하기도 했다.

왕후가 비구니로 출가한 사례도 있었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였던 허경 스님이 그 예.
단종은 1456년(세조 2년)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 때는 세조의 보호로 처벌을 면했지만 그 이듬해 다시 단종의 복위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됐다. 이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 정순왕후도 노산군부인으로 강등됐다.
황 교수는 “이 때 노산군 부인은 세조가 내려준 집을 마다하고 따로 청룡사 곁에 초가를 짓고 스스로 정업원 주지라고 칭했다”며 “정업원은 공식화된 비구니 도량이었고 적어도 왕실의 시책과 가까이 하는 자가 주지에 내정됐을 것이다. 노산군 부인이 정업원에 머무는 것은 당시의 상황과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궁궐 밖에 기거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문종의 즉위 직후부터 유생들은 후궁이 비구니로 출가하는 것에 대해 적극 반대하기 시작했다. 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가 아들 덕원ㆍ창원군과 3000여 명을 이끌고 양주 회암사에서 불공에 참여했다가 조정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황 교수는 “연산군 10년 1504년에 80세의 나이로 출가한 근빈 박씨는 비구니가 된 후에도 연산군의 연회에 동원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황인규 동국대 교수(가운데)가 한국불교학회가 4월 10일 개최한 제51회 전국불교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있다.

태종의 죽음 직후 중종대 무렵까지 후궁의 출가는 계속됐다.
황인규 교수는 “왕실여인들은 죽을 때 까지 모셔야 하는 왕의 죽음 후 출궁이나 개가가 허용되지 않은 제약된 삶이라는 한계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억불시책이 강화되는 시기에 굳이 비구니로 출가를 하게 된 것은 그녀들의 개인적인 불교신행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숭유억불 시대였다고는 해도 조선시대 전반에는 신라-고려에서 이어온 불교 신행의 분위기가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황 교수는 “불교신앙에 전념한 왕실녀 비구니들로 인해 우리의 역사와 문화 가운데 가장 굴절되고 폐쇄적인, 특히 여성에게 ‘한 맺힘’의 시기였던 유교문화시대는 조선후기에나 가능했다. 결국 조선전기 왕실녀 출신의 비구니들은 우리의 자유롭고 개방ㆍ통합적인 불교전통문화를 수호한 선봉자였다”고 주장했다.

한편, 종로구청은 서울시의 후원으로 정순왕후와 단종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 ‘비애비(妃愛悲)’가 4월8~20일 공연했다. 공연 첫 날인 조계종 포교원장 혜총 스님, 문화부장 효탄 스님 외 주요스님들이 참석해 관람했다.

# 정업원(淨業院)은 조선시대에 후궁이나 남편을 일찍 잃은 왕녀들이 비구니가 돼 여생을 보낸 곳이다. 사찰은 고려 시대인 922년(태조 5)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됐다. 1771년(영조 47)에 영조가 절 내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우고 단종을 애도했는데, 이때부터 절 이름을 정업원이라 불렀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현 청룡사 부근)에 그 터가 있다.
이나은 기자 | bohyung@buddhapia.com
2010-04-24 오전 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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