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있어야지. 어찌 알고 새긴단 말인가.”
“여보게, 미륵님을 못 보았다고? 이런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미륵님이란 자네 아닌가. 자네 모양과 똑같은 이가 미륵님일세.” 유민들은 다시 정신없이 돌을 쪼아 미륵상을 세웠다.
운주사는 황석영(黃晳暎ㆍ1943~)의 소설 ‘장길산’에서 대단원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이다. 소설은 천민 장길산을 비롯한 민중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다. 천불산 계곡에 자리한 운주사는 도선국사가 미륵불의 도래를 이루기 위해 천불천탑을 세운 뒤 창건했다고 전해오는 절인데, 소설 속에서는 세상 끝으로 밀려난 백성들이 미륵의 시대를 꿈꾸며 역시 천불천탑을 세우고 만든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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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옆길로 개나리가 피어있다. 일주문을 버리고 개나리를 따라 걸었다. 도선국사의 운주사를 버리고 ‘장길산’의 운주사로 들어갔다.
때는 조선 숙종. 천민 장길산을 비롯한 힘없는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세상 밖으로 밀려난 그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것은 신앙이었고, 그 신앙은 고단한 입에서 고단한 입으로 전해오던 ‘미륵’이었다. 이제 그 신앙은 더 이상 고단한 입을 찾아 떠도는 미완의 신앙이 아니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협곡 속에 숨어 살면서 미륵님의 계시를 들었다. 이 골짜기 안에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우면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온다는 것이었다. 도읍지가 바뀌는 세상, 그들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곳에 서울을 세우리라는 미륵님께 서원합니다. 여기가 염부제(閻浮提)가 되리라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천민이여 모여라. 모여서 천불천탑을 만들자.” 그들은 황토뿐인 야산에서 바위를 찾으려고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들판을 달리고 강을 건넜다. 그들이 세운 절의 이름은 ‘운주사(運舟寺)’였다. 젊은 유민이 물었다. “할아버지, 절 이름이 어째서 운주사요?” “배를 부린다는 뜻이란다. 새로운 우리 세상이 바로 배가 되는 게야. 미륵님 세상이 배가된다. 우리 중생이 물이 되어 고이면 배가 떠서 나아가게 되는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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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에는 봄에 피어야 할 꽃들이 모두 피어있었다. 벚꽃까지 머리를 내밀었고, 바위틈엔 듬성듬성 진달래까지 붙어있었다. 도량엔 꽃들이 가득했지만 아쉽게도 천불천탑은 모두 다 남아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불상이 있었고, 발길 머무는 곳마다 석탑이 있었다. 불상들의 얼굴엔 못 다한 이야기가 가득했고, 길어진 석탑들의 그림자 끝엔 돌을 쪼던 백성들의 손길이 묻어있었다. 불사바위로 오르는 길에 작은 불상이 숨은 그림처럼 붙어있었다. 아이의 모습이다. 아이는 미륵의 세상을 보지 못했다. 어린 미륵불은 멀리 와불이 누워있는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닭이 울었다!” 거짓말이었다. 누워있던 마지막 미륵을 밀어 올리려던 사람들도 힘없이 주저앉아버렸다. 미륵상은 비탈 저 밑에 처박혀서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 미륵상이 되기 위해 우뚝우뚝 새까맣게 몰려오던 사방의 바위들도 소문을 듣고는 그 자리에 넘어져버렸다. 그렇지만 넘어지면서도 머리는 계곡 쪽을 향하였으니 먼 훗날에라도 와불이 바로 일어서면 다시 미륵이 되기 위해서였다. 바위들은 민병의 쓰러진 시체처럼 들판과 야산의 곳곳에 넘어져서 오랜 비바람에 씻겼다. 그 뒤부터 운주사의 대문을 닫을 적마다 서울 장안에서 우지끈대는 우렛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서울이 옮겨지지 않은 것을 한하여 그런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래서 대문을 떼어 영산강으로 떠나보냈다. 운주사는 그 뒤로부터 운주사(雲住寺)가 되었으며, 이는 물이 차오르지 않아 세상이 머물러버렸던 까닭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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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은 역사 속에서도 소설 속에서도 더 이상 찾을 수 없이 실종되고 만다. 어디로 갔을까. 끝없이 고단하기만 했던 그 날의 백성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랬다. 모두 그곳에 있었다. 미륵을 기다리다 모두 미륵이 되었다. 먼 훗날 산마루에 누워있는 와불이 일어서고 사방에 넘어졌던 바위들이 다시 일어나 천불천탑을 세우는 날, 운주사(雲住寺)는 다시 운주사(運舟寺)가 될 것이다.
오늘도 산마루의 와불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운주사를 찾는다면 미륵의 마음으로 갈 일이다. 그 곳엔 미륵만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