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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자의 혼인과 육식 행위는 근현대 한국 불교에서 정화와 분규의 단초가 됐다. 근현대 선지식이었던 용성 스님(1864~1940)은 두 차례에 걸친 건백서를 통해 대처식육의 금지를 촉구했다.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는 최근 출간한 <한국 현대선의 지성사 탐구>에서‘용성의 건백서와 대처식육의 재인식’을 통해 용성 스님이 조선총독부에 건백서를 제출했던 1920년대 당시를 중심으로 대처식육 논란을 학술적으로 조명했다.
용성 스님은 1926년 5ㆍ9월 뜻을같이 하는 출가자 127인의 날인을 첨부해 “불법에는 대처식육의 설이 없다”는 건백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했다. 당시 일제 및 불교계는 용성스님의 제안을 거부하고, 사법개정을 통해 스님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정책을 단행했다.
김광식 연구교수는“건백서 제출이후 대처의 풍조가 점차 확대돼1930년에 이르러서는 불교계의80%가 대처승도 주지가 가능할 뿐더러 대처는 당연하다는 입장을 보였다”라고 설명했다.
김광식 연구교수는“용성 스님이건백서를 제출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한국인 학승이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이후 대부분 결혼을 하게 된데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김 연구교수는“1925년 유학생 출신의 대처승이 본산 주지에 취임하기 위해 본산 사법개정을 추진했으나 일부 본산의 반대로 무산된 사례가 있었다”면서“친일파이자 불교도인 이완용을 내세워 일제 당국에 로비까지 했다”고 강조했다.
김광식 연구교수는‘매일신보’를 인용해“일제가 승려의 대처식육을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합법화시켜 그것을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불교를 비롯한 각 종교에는 종교별 정체성을 상징하는 계율이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계율을 중요시 여기며 이를 어길 경우 파계승이라고 해 승단에서 내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연유로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대다수의 스님들이 대처식육을 별 고민 없이 수용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 김광식 연구교수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을 시도했다.
김 연구교수는“개항과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 해제 이후 승려의 신분상승 및 사찰 안정 등의 요인으로 승려 인권이 고양됐다”면서“스님들의 일본 유학이 늘어난 것도 한 이유”라고 말했다. 김광식 연구교수는“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로 승려는 천민으로 매도당하고, 한양의 사대문 출입도 금지 되는 등 열악한 대우를 받았다.
억울한 대우를 받던 승려가 개항(1876) 이후에 서서히 신분이 상승된 것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연구교수는“일본불교가 유입되면서 일본불교의 모방을 통해 한국 불교는 산중에서 도회지로 나가야한다는 분위기에 고취됐다”면서“만해 한용운이 舊한국정부와 통감부에‘승려 결혼은 자유스럽게 선택하게 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도 승려의 결혼문제가 사회에서 용인시 된 한 이유이다”라고 말했다.
김광식 연구교수는“최근 승려들 사이에서는 육식에 대해 관대한 추세이고, 15년 전에는 학술토론회에서 은처승 문제가 다뤄지기도 했다”며 대처식육에 대한 현 불교계의 인식상황을 덧붙였다. 김 연구교수는“조계종은 식민지불교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전개한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재건된 종단이라며“조계종단 구성원이 어떻게 현실인식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뇌 및 입장의 표명을 말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종단차원의 자정 기능과 역사의식이 건강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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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책에는 △백학명의 불교개혁과 선농불교 △한암의 종조관과 도의국사 △송서암의 불교개혁론 등 근현대 선사를 불교사상사적으로 재조명한 저자의 연구논문이 수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