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로 오르는 길엔 개울이 함께 따라왔다. 봄이긴 했지만 개울물은 아직 차갑게 흘렀다. 전북 고창의 도솔산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세워진 시기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세웠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 스님이 세웠다는 설이 있다.
대웅전과 영산전 뒤로 동백숲이 보였다. 미당이 보러 왔다 못보고 간 동백이 작년 것부터 뜨문뜨문 피어 있고, 지난 것들은 벌써 쉰 목에서 나오는 육자백이처럼 제 가지를 끊어내고 있었다. 마당엔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 있고, 대웅전 벽의 기둥들은 숲 속에서 봄을 맞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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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의 고향 질마재는 그의 시 세계에서 중요한 지리적 공간이다. 선운사는 그 공간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지리적 공간이자 정신적 공간이 된다. 유년기를 고향에서 보낸 미당은 고향을 떠났다가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청년기 시절을 질마재와 선운사에서 다시 보내게 된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에 참가했던 미당은 재학 중이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고향으로 내려와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지만 광주학생사건과 관련되어 다시 학교를 그만 두게 된다.
가난을 안고 고향을 떠났던 미당은 가난 속의 고향 질마재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미당의 유년과 청년시절은 시절 자체가 가난과 혼란의 시대였다.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와 레닌에 기대있었고 미당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당이 고향 질마재로 다시 돌아왔을 땐 마르크스와 레닌의 웅변이 왠지 미당에게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 때 미당을 만져준 것은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다녔던 절집의 향수와 그 곳에 머물고 있었던 석전(박한영ㆍ1870~1948) 스님이었다. 한시에 능했던 문인이자 독립운동의 맨 앞줄에 서있던 석전 스님은 날개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청년에게 따뜻한 둥지가 되어준다. 훗날 미당은 “내 고통과 방황의 시기에 내 피와 살을 데워준 분은 석전 스님이었다”라고 회고한다. 미당은 그 따뜻한 둥지 안에서 불교와 가까워졌고, 다친 날개를 다시 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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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이 피고 지는 대웅전과 영산전 사이에 미당이 머물던 방이 있었다고 한다. 미당이 선운사에 머무는 동안 그의 언어엔 부처님의 말씀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훗날 불교적인 시를 많이 쓰게 된다. 1947년 미당은 ‘국화 옆에서’를 발표한다. 우주적인 연기와 인연설을 기초로 한 이 시는 미당의 천편이 넘는 시 중 그를 대표하는 시가 된다. 들꽃 사이에서 찾아낸 작은 돌로 쌓아올린 길가의 적석탑처럼, 가슴 속에서 찾아낸 언어들로 쌓아올린 그의 시는 손으로 덥석 만져볼 수 있는 거대한 석탑이 아니라, 눈으로만 보아야 하는, 마음으로만 읽어야 하는, 그래서 무너지지 않는 오솔길의 적석탑 같다.
돌담 너머에 작은 동백나무 하나가 꽃잎을 틔우고 있었다. 산새 한 마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며 돌담에 날아와 앉았다. 동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선운사에 가면 동백을 보고 온다. 그렇다 선운사를 찾는다면 동백을 보고 와야 한다. 하지만 피지 않은 동백은 어찌 해야 할까. 선운사 입구에는 미당의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그의 시 ‘선운사 동구’가 새겨져있다.
선운사 골짜기로 /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 동백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돌담 위에 내려와 앉았던 산새는 동백을 다 보았을까. 혹시 작년 것만 피어 있다고 목이 쉬게 울고 간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