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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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속의 문화읽기-6. 초의 스님의 해남 일지암(一枝庵)
대흥사(대둔사)의 13대종사 중 마지막 대종사인 초의(草衣ㆍ1786~1866) 스님은 어느 날, 쉬어갈 나뭇가지 하나를 찾는 산새처럼 조용한 곳에 암자 하나를 짓는다. 그리고 40 년을 그곳에서 쉬었다 간다. 초의 스님의 마지막 한 자리 일지암이다.


대흥사 마당에 들어섰을 땐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일지암은 대흥사 산내 암자다. 초의 스님의 일지암은 스님이 입적하시고 난 후 폐허가 됐고, 지금의 일지암은 옛터를 찾아내 복원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만난 일지암에는 3대 주지(암주)인 무인(無因) 스님이 차를 우려 놓고 계셨다. 손수 만든 차였다. 다구 속에 담긴 찻잎은 초의 스님이 일군 일지암 차밭에서 온 것이었다. 명차였다. 차 맛을 읽을 줄 몰라 죄송스러웠다. 일지암에서 차 맛을 몰라보는 것은 문맹이었다. 스님이 빈 찻잔에 차를 채웠다.


초의 스님은 종사로서의 면모는 물론이고, 시(詩)ㆍ서(書)ㆍ화(畵)ㆍ차(茶) 등 많은 분야에서 깊었던 분이었다. 그 중 차에 관한 업적이 특히 후세에 많이 전해졌다. 스님은 깊은 다인(茶人)이었다. 일지암을 짓고 난 후 일대에 차나무를 심고, 다서(茶書)의 고전인 <다신전>과 <동다송>을 썼다. 특히 <동다송>은 다인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책으로 전해진다. 당시 학자이자 명필이었던 추사 김정희는 스님의 차에 반해 스님의 평생지기가 된다. 차를 보내 달라 떼를 쓰는 추사의 서신은 유명한 일화다.
스님은 일지암에 머무는 동안 지관겸수(止觀兼修)에 전력을 다해 대종사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유가(儒家)의 선비들과는 시ㆍ문을 주고받으며 문인으로서의 영역을 남겼다. 또한 대흥사 대광명전의 단청과 벽화를 손수 그리는 등 많은 불화를 남겼고, 유배지의 도반이 생각날 땐 먼 길도 마다 않으며 따뜻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남겼다.

작년 봄부터 일지암에 살고 있는 무인 스님은 초의 스님부터 치면 4대 주지인 셈이다. 스님은 초의 스님의 흔적 위에 살게 된 것을 축복으로 생각한다면서, 세간에서 초의 스님이 다인으로서만 크게 부각되어 있는 것이 조금 아쉽다고 했다. 초의 스님은 분명 ‘보우’(普雨)라는 커다란 이름에서 비롯된 서산, 편양 법맥의 마지막 종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의 스님의 별호 앞에 ‘종사’대신 ‘다성’(茶聖)이나 ‘차의 중흥조’ 등의 말이 먼저 붙는 것은 스님의 법명을 온전히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주지 스님이 다시 찻잔에 차를 채웠다. 밤이 깊어갈수록 찻잔 속에 떨어지는 찻물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왔다.


새소리에 잠을 깼다. 새소리가 지나간 문틈을 아침 햇살이 몰려와 채웠다. 더 이상 문을 닫고 누워있을 수 없었다. 사립문 밖에서 동백나무 하나가 꽃잎을 툭툭 던지고 있었다.
일지암의 구조는 다른 암자들과는 많이 달랐다. 일지암 편액이 걸려있는 작은 당우는 5평 정도의 정사각형으로 볏짚으로 지붕을 올렸다. 초가집이다. 추녀 밑에는 작은 다절구가 있었다. 암자 뒤켠에는 유천이라 이름 붙은 샘에서 맑은 물이 대통을 따라 흐르고 있었고, 뜰엔 연못이 있어 구름도 담기고 꽃잎도 담겨 있었다.
일지암은 작은 암자였다. 그러나 커다란 암자였다. 일지암은 없어진 암자였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암자였다. 일지암엔 초의 스님의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일지암엔 초의 스님의 것 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밭에서 차동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잠깐 보았다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온다. 멀리서 주지 스님이 차동이를 부른다. 아침 공양이다.
일지암을 찾는다면 스님의 높았던 이름보다는 따뜻했던 가슴을, 스님이 남긴 업적보다는 스님이 가졌던 불교를 생각하며 찾아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동백나무가 또 꽃잎을 툭툭 던지고 있었다.
글ㆍ사진=박재완 기자 | wanihollo@hanmail.net
2010-03-19 오전 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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