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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우리 곁을 떠난지 일주일이 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법정 스님의 완전한 무소유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3월 17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 앞마당에는 법정 스님의 초재를 지내기 위한 신도들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스님을 쉽게 잊지 못하고 있었다. 매서운 꽃샘추위에도 신도들은 법정 스님의 영가를 기리기 위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초재는 관욕, 사시헌공, 추모사, 합창단 음성공양, 종사 영반, 순천 송광사 법흥 스님 추모사, 장엄 염불, 전국선원수좌회 전 대표 혜국 스님(석종사 선원장) 법문 순으로 2시간 여 진행됐다.
제단에는 법정 스님의 영정과 검박한 제사상이 차려졌다. 조계종에서 법정 스님을 대종사로 추서했지만 위패는 여전히‘비구 법정(比丘 法頂)’이라고 쓰여 있었다. 스님의 유훈을 따르려는 상좌 스님들과 문도, 신도들의 노력이 엿보였다.
법정 스님과 효봉 스님을 은사로 모셨던 법흥 스님은 추모사에서 “법정 사형님, 서울삼성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생전에 찾아뵈려 했으나 생전에는 못 뵙고 추모사를 하게 돼 송구스럽습니다”라며 시작했다. 이어 스님은 “팔공산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이 저희에게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고 했을 때 몸 둘 바를 모르고 떨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원고료 몇 푼으로 불일암 중창불사를 하던 사형을 도우며 가까이 모셨던 것이 생생합니다”라며 법정 스님과의 생전 추억을 떠올렸다.
법흥 스님은 “산문집 <버리고 떠나기>에서 송광사 행사에는 일체로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강원도 산골로 떠난 후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법정 사형님은 불의에 극복하지 않았으며 교육포교의 대전략가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수필가입니다”라며 그리워했다.
이어 스님은 “세상은 제행무상,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하는 것이지만, 존안을 뵐 길이 없는 이 중생의 슬픔을 누가 알겠습니까?” 라며 짧은 추모사로 슬픔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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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국 스님은 1980년대 법정 스님과 송광사 수련회를 함께 이끌었다. 스님은 “초재에 3배라고 드리고 싶어 왔다”고 밝혔다.
혜국 스님은 법문에서 “해인사 선방에서 수행하던 신도가 팔만대장경을 빨래판으로 생각하는 것을 보고 봉은사에서 역경을 시작했다. 1975년 인민혁명당사건에서 청년 8명이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수행을 시작했다”며 “마음 수행, 인격 형성이 되지 않고는 법도 죄도 무용지물임을 마지막까지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마음 수행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때 법정 스님을 영원히 모시는 것”이라며 추모했다.
이날 초재에는 실상사 주지 덕현 스님 등 상좌스님, 손상좌 스님, 송광사 문도들과 조계종 포교원장 혜총 스님, 송광사 주지 영조 스님 등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