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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구두를 신는 엄마가 참 부러웠었다. 그래서 가끔 엄마가 외출하던 날에는 신발장에서 몰래 구두를 꺼내 신곤 온 집안을 누볐다.
구두 크기의 절반도 되지 않는 발로, ‘따각따각’구두 소리를 내며.
나이를 먹고, 원 없이 구두를 신을 수 있게 됐지만 구두 신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도 편하지도 않았다. 좁아터진 구두 안으로 발을 구겨 넣을 때는 저절로 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더군다나 구두를 신어 물집이 터진 발을 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물집 터진 발로 구두를 신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안으로는 상처가 곪고 터져도 밖으로는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 어른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아파도 아닌 척, 울어도 안 울은 척, 슬퍼도 아닌 척, 슈퍼파워 ‘캔디’형 인간이 돼야한다.
<한영 보현행자의 서원>은 우리가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해 불러야할 유행가 같은 존재다.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이 책은 우리가 앞으로 불러야할 모든 노래가사를 담고 있다. 번뇌란 것은 좀 전까지 손톱만한 크기였어도, 눈 깜작할 새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음을 짓누른다. 비워야할 것들이 금방 차오른다.
아무리 좋은 경전 말씀도 지금 이 순간에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뿐이다. <한영 보현행자의 서원>은 부처님께 드리는 서원이지만, 사실은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서원이기도 하다. 책은 우리가 부처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주의를 둘러보면 모든 것이 부처이다. 부모도, 형제도, 그리도 친구도. 내가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도 곧 부처고, 보살이다.
고려시대 균여 대사는 <보현십행원가>를, 우리 시대에 보현보살로 함께 계셨던 광덕 스님은 보현행원을 원으로 삼아 <보현행자의 서원>을 노래했다. 책은 지금 이 순간 부처로 살고 싶으면, 보현행자의 서원을 수지하고 독송하라고 권한다. 나 자신 하나가 바뀜으로 가정이, 이웃이 그리고 세상이 밝아지고 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선재 동자가 문수보살에게 물었다. “해탈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닦아야 합니까?”
문수보살은 “보리심을 발하고 선지식을 찾아 묻고, 보현행원을 하라”고 답했다. 선재 동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53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구법했다. 대승불교의 꽃인 <화엄경>은 무엇이 부처이며 어떻게 부처가 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53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구법하는 선재 동자는 가장 마지막에 만난 보현보살을 통해 부처의 세계인 법계에 들어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과 같을 지도 모른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선재 동자가 선지식들을 찾아다녔듯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비우고 깨닫는 과정이 아닐까? 물집 잡힌 발로 구두를 신는 것처럼, 삶은 불어터진 발처럼 고달프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기도 하다.
가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힘들고 지치다면, 보현행자의 노래를 불러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듯싶다. 노란색 책에 담긴 서원들이 ‘망할 구두’를 ‘구두보살’로 나투게 한다. 한국말 노래가 지겹다면, 영어 번역도 함께 들어있으니 걱정하지 말자.
한영 보현행자의 서원|광덕 지음·김영로 역|불광출판사 펴냄|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