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9년 음력 7월 8일, 84세의 일연(一然ㆍ1206~1289) 스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입적을 알리고 바로 적멸에 든다. 서안 앞에 앉아 매일 먹을 갈고, 그 먹을 들어 민족의 역사를 꼼꼼히 써내려갔던 스님은 마침내 자신이 써내려간 역사의 긴 문장 끝에 눕고, 스님이 떠난 자리엔 후손들이 읽어야 할 명작 하나가 남는다. 삼국유사(국보 306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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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전 스님을 여읜 인각사는 스님이 남긴 증거 속에 겨우 살아 있을 뿐이었다. 스님을 여의었듯 거듭된 슬픈 역사 속에서 천년의 도량을 모두 여의었다. 일주문도 없었고 천왕문도 종루도 없었다. 2차선 아스팔트 도로에서 바로 시작되는 도량엔 2001년에 세워진 국사전과 조선시대 당우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명부전만이 향을 올리고 있었고, 역사가 묻어버렸던 차가운 돌무더기와 일연 스님의 부도(보물 428호)가 도량의 뒤뜰을 지키고 있었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시대(11~12년)에 세워진 절로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입적한 절이다. 사라진 인각사의 옛 모습은 자세히 전하는 문헌이 없어 가람의 형태를 유추하기 어렵다. 1992년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을 통해 절의 규모와 형태를 찾고 있다.
일연 스님은 고려 희종 2년(1206), 최충헌이 세상을 잡은 무신의 시대에 태어난다. 9세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광주의 무량사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 스님은 14세에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에서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는다. 그리고 충렬왕 9년(1283)에 국사가 된다. 스님이 살아야 했던 시절의 역사는 참으로 어려웠다. 정치적으로 어려웠고 몽고의 침략으로 더욱 어려웠다. 백성이 견뎌야 할 어려운 시절과 국사로서 스님이 감당해야 했던 위태로운 역사가 삼국유사라는 역작을 쓰게 한다.
고조선에서 삼국시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는 다른 역사서와 많이 다른 책이다. 우선 역사서라 불림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는 완벽한 ‘사실의 책’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사료와 문헌을 중심으로 연대를 따라 역사를 기록한 보통의 역사서와 다르게 삼국유사는 스님이 평생 이 땅의 곳곳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자유분방하게 엮어놓았다. 이야기마다 동원된 무한의 상상력이 그것이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자연스럽게 용인되는 그 상상력은 역사를 확장시키고, 우리의 문화와 불교를 확장시킨 이 책의 매력이며 값어치다.
힘들고 위태로운 시절을 함께 살았던 한 나라의 국사가 백성들이 알아야 할 역사와 문화, 종교, 신화 등을 백성을 생각하며 쓴 삼국유사는 단군 신화로 시작하는 민족의 족보이자 ‘순도가 고구려에 오다’로 시작되는 불교 문화서이고, 삼국 시조의 탄생 이야기와 향가가 수록된 설화와 신화의 모음집이자 문학서인 동시에 역사와 철학이 지나간 인문서다.
삼국유사는 완벽한 사실의 책이 아닌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준 기록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준 물음이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단군을 모른 채 살았을 것이고, 수많은 우리의 설화와 신화를 모른 채 살았을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700년 전 우리 곁에 왔다 간 일연이라는 가슴 따뜻했던 한 스님의 이름을 모른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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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부도 곁으로 까치 한 마리가 다가갔다. 인각사를 찾는다면 절을 찾는다는 마음보다는 선산(先山)을 찾는 후손의 마음으로 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백성과 후손을 생각했던 조상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뜨거운 의미를 떠올리며 찾아간 역사의 도량 인각사. 당우 두 채만이 서있는 아쉬운 도량의 뒤뜰에는 스님의 부도가 그 옛날 스님의 마음처럼 차가운 돌무더기 사이에서 따뜻하게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