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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영주 부석사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적이 있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고 부석사엔 아침 안개만 자욱했다. 멀리서 운해를 걷어낸 소백산 능선들이 하나 둘 깨어나고 있었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아무도 없는 무량수전 마당을 마음껏 거닐게 했다. 이슬에 젖어있는 배흘림기둥의 간격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사뿐히 날아와 앉은 추녀의 곡선도 여전히 우아했다. 이른 아침 안개 속에서 보는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날, 약속이 잘못되어 만나기로 했던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먼 거리를 달려온 시간과 수고가 허망했지만,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무량수전의 마당을 마음껏 걷게 해준 그 잘못된 약속이 고맙기도 했다. 나는 그 때 부석사가 서산에 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