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땅은 젖어있었다. 이른 봄비 끝에 묻어온 짙은 안개와 운해가 길을 감추고 월출산 허리를 지워가고 있었다. 그 감춰진 길 끝에, 지워진 산기슭에 전설의 극락보전이 있었다. 그리고 미완의 벽화가 거기 있었다.
| |||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 스님이 세운 절로 500년 전에 그려진 벽화를 31점이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미술관 같은 절이다. 그 31점의 벽화가 그려진 극락보전 역시 당대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는 국보(13호) 불전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보물에서 국보(313호)로 승격된 후불 아미타여래삼존벽화와 후불벽화 뒷벽에 그려진 백의관음도(보물 1314호)만이 극락보전에 그대로 남아있고, 나머지는 1956년 극락보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벽화보존각을 세워 그 곳에 봉안했다.
극락보전에 들어서면 벽화를 들어낸 쓸쓸한 벽들이 전설 속의 파랑새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색채를 잃은 빈 벽의 쓸쓸함은 새로운 구도로 그려진 조선불화 한 폭을 감상하는 동안 잊게 된다. 협시보살을 아미타여래와 거의 나란히 세우고 나머지 공간을 6나한으로 채운 원형구도의 아미타여래삼존벽화는 협시보살을 아미타여래 무릎 아래에 그려 위계를 강조했던 2단구도의 고려불화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조선불화이다. 전설 속의 파랑새는 그 벽화에서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지 못했다. 전설은 여기에서 만들어진 듯했다. 관음보살의 눈동자만이 그려지지 않은 것에서 누군가 만들어낸 전설인 것 같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극락보전의 벽화는 해련 스님과 선의 스님 등이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잠시 잊었던 빈 벽의 쓸쓸함이 결국 나머지 벽화가 봉안되어 있는 벽화보존각으로 향하게 했다. 극락보전 벽에 붙어 있어야 할 벽화들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잡혀온 동물원의 동물처럼 이름표를 붙이고 유리관 안에 걸려 있었다. 아쉬운 일이었지만 볼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할 일이기도 했다. 슬픈 역사와 함께 사라진 성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극락보전에서 빈 벽의 쓸쓸함이 벽화보존각으로 향하게 했다면, 이번엔 벽을 잃은 벽화들의 쓸쓸함이 다시 극락보전으로 향하게 했다. 다시 극락보전에 서서 마음속에 담아 온 벽화들을 빈 벽에 붙여보았다. 500년 전의 법당이었다.
| |||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은 산과 당연히 흘러야 할 것 같은 강물처럼 무위사는 월출산 기슭에 있었다. 무위사를 찾는다면 미술관에 가는 기분으로 길을 나서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고려불화를 몰라도 좋고, 조선불화를 몰라도 괜찮다. 무위사에 걸린 작품들은 불심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한 손에 염주를 들고 법당을 돌며 벽을 잃은 벽화와 벽화를 잃은 극락보전의 빈 벽을 쓰다듬어 보는 것이다. 파랑새가 그렸든 해련 스님이 그렸든 지나간 일은 모두 같은 전설이다. 풍경소리가 울리고 목탁소리가 들리는 전남 강진의 미술관에는 500년 전의 전설이 전시되고 있었다.
| |||
극락보전의 풍경을 요란하게 울리며 봄바람이 불어왔다. 천불전 뒤의 산봉우리에 머물던 운해가 순식간에 도량으로 내려왔다. 말 한번 붙여보지 못한 삼층석탑이 운해 속으로 사라지고, 애달프게 바라보던 극락보전은 지붕 끝만 섬이 되어 마당 위에 떠올랐다. 운해에 떠밀려 천왕문을 나섰다. 마지막 남은 천왕문도 운해 속으로 사라졌다. 미술관은 그날 그렇게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