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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 스님(1892~1982)은 만해ㆍ효봉ㆍ구하 스님 등과 교류했던 인물로, 영축총림 통도사의 선풍을 크게 떨친 선지식이다. 경허ㆍ용성ㆍ만해ㆍ성철 스님 등 여러 선사에 대해서는 불교학계를 중심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졌으나, 경봉 스님은 학술적인 조명이 시도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경봉 스님의 문손인 정도 스님이 동국대 박사학위 청구 논문 ‘경봉 선사 연구’에서 스님에 대한 학술적 조명을 최초로 시도해 눈길을 끈다.
정도 스님은 경봉 스님의 저서인 <법해> <사바세계를 무대로 멋있게 살아라> <삼소굴 일지> 등을 비롯해 <경봉 스님 말씀> 등 후학이 편찬한 스님 관련 문헌을 중심으로 연구했다.
정도 스님은 “경봉 스님은 근현대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간화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통도사를 중심으로 가람수호와 교화에 남다른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말했다.
정도 스님은 “경봉 스님에게 선과 교는 둘이 아니었다. <화엄경>이 설한 세계가 선의 세계와 같음을 누차 강조했을 만큼 스님에게 선과 교가 가리키는 세계는 하나였다”며 경봉 스님의 선사상을 선교일치와, 생활ㆍ간화선풍으로 설명했다.
만일참선결사와 화엄산림결사를 주도하며 선풍을 진작시켰던 경봉 스님은 1700공안 외에 자신만의 화두를 대중에게 제시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경봉 스님은 자신만의 화두를 통해 대중과 법담을 나누고 법거량 하면서 마조ㆍ임제 등의 조사선풍을 활발발(活潑潑)하게 드날렸다.
법어집에서 “경봉 스님이 법좌에 올라 주장자로 법상을 세 번 치고 이르시기를, 주장자 머리에 눈이 있는데 밝기가 태양 같고 순금은 불에 넣어봐야 할 수 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길에서 도를 통달한 사람을 만나면 말이 필요없다고 했으니, 대중은 무엇으로 이 도인을 대하겠는가?”라고 물음이 그 예이다.
정도 스님은 “경봉 스님의 심적 경지는 법어집 단락마다 게송으로 들어가 있다”며 “특히 스님만의 화두는 경봉 스님이 간화선을 대중화하고 현대화한 공로로 평가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스님은 “경봉 스님의 선교겸수는 (성철 스님에게 내교외선內敎外禪이라 비판 받은) 보조 국사의 선교일치와는 다르게 선과 교가 하나인 차원”이라며 “노인을 대상으로 했던 ‘양노염불만일회’와 지금까지 통도사에 이어지는 ‘화엄산림결사’ 등 결사는 개인적인 수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더불어 수행하고 실천하는 불교를 이루고자 하는 경봉 스님의 원력이 잘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도 스님은 경봉 스님의 삶을 재가시기(~16세), 출가구도기(~36세), 전법도생기(~62세), 회향기(~91세)로 구분했다.
스님은 “경봉 스님의 삶과 사상 속에는 근현대 한국불교의 용광로와도 같이 모든 불교계의 고민과 대안이 담겨져 있었다”면서 “경봉 스님이 주석하던 삼소굴은 근대 선지식들과 출ㆍ재가 수행자들이 녹아 하나가 된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이는 범성(凡聖)과 출ㆍ재가, 선교가 둘이 아닌 차원에서 모두 아우를 수 있었던 경봉 스님의 회통적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경봉 스님은 정화운동에도 참여했다. 정도 스님은 “경봉 스님은 통도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선리참구원과 선학원 등을 중심으로 일제의 불교정책에 맞서 간화선의 선풍을 진작시키고 해방 이후 측면에서 정화를 후원했다”고 말했다.
정도 스님은 “‘한 세상 안 나온 셈치고 바보가 돼 오로지 눈 뜨는 공부에만 매진하라’며 납자들을 경책하던 경봉 스님이었다. 최근의 선풍토가 교학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도 경봉 스님의 영향이 있어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스님은 “오늘날 한국 불교가 부산ㆍ영남을 중심으로 크게 번성한 것은 경봉 스님의 선풍과 교화의 영향이 크다”고 강조했다.
#경봉 스님은…
양산에 장이 설 때면 커다란 걸개와 불화를 들고 나가 장터 한가운데서 법문했던 스님은 ‘입전수수’를 몸소 실천한 선지식이었다. “사바세계를 무대로 연극 한번 멋지게 해보라”고 호탕하게 외쳤던 스님의 장터 법문은 지나가던 사람과 물건 팔던 상인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듣지 않고는 못 베길 정도로 재미난 법문이었다.
경봉 스님은 24세에 모친상을 당한 뒤 인생무상을 느껴 양산 통도사로 출가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합천 해인사, 김천 직지사 등 제방의 선방을 돌며 수행정진을 거듭했던 스님. 경봉 스님은 “통도사로 돌아오라”는 은사 성해 스님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을 정도로 구도의 열정이 남달랐다. 어느 정도 공부가 잘 돼가고 있다고 판단한 경봉 스님은 그제서야 통도사로 돌아왔다.
1927년 화엄산림법회를 주재하던 경봉 스님은 밤낮의 구분이 사라지고 시야가 확 트이는 불이(不二)의 경지를 맛봤다.
그때 남긴 오도송이 “천지를 삼키니 큰 기틀이로다/ 돌토끼 학을 타고 진흙거북 쫓아가네/ 꽃 숲엔 새가 자고 강산은 고요한데/ 칡덩굴 달과 솔바람 뉘라서 완상하리”였다.
경봉 스님은 1928년 통도사에서 1시간 거리의 극락암에 극락호국선원을 열고 영축산 자락에 선풍을 떨치기 시작했다.
스님은 명필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사형인 구하 스님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해 구하 스님 생전에는 글씨자랑 한 번 한 적 없었다. 경봉 스님은 글씨 뿐 아니라 글 짓는 실력도 뛰어났다. 스님은 여러 스님들과 소중한 벗에게 편지로 선문답을 주고받고 안부를 묻는 일을 즐겼다. 경봉 스님 열반 후 모아놓은 편지와 일기만 몇 가마니 분이었다.
경봉 스님은 입적 14년 전 자신의 수의를 짓던 날, “옛 부처도 이렇게 가고/ 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청산은 우뚝 섰고 녹수는 흘러 가네/ 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은가 쯧!/ 야반 삼경에 춤을 볼지어다”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1982년 세수 91세였던 스님의 열반에 앞서 상좌인 명정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스님이 가신 뒤 스님을 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경봉 스님은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는 말을 남기고 이승과의 인연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