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속을 결심한 기봉 스님이 큰스님에게 물었다. 큰스님은 법당 처마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남에서 온 제비야 고향길은 어디로 나 있더냐? 네가 물어간 볍씨 한 알에 황금빛 수선화는 입을 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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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하 달마가)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스님 셋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그 때 나는 달마가 누군지 몰랐다. 동쪽으로 간 것도 몰랐고, 왜 갔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리고 영화를 촬영한 곳이 이 곳 영산암이었다는 것도 21년이 지나서 알게 됐다. 연로한 큰스님이 방안에서 문살에 기댄 햇살을 살며시 밀어내며 동자 해진을 부른다. “해진아!” 열린 문으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작은 마당이 보이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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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은 신라 문무왕 12(672)년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창건한 봉정사(鳳停寺)의 부속 암자다. 영산암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몇 가지 사료를 통해 19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다. 우화루와 관심당, 송암당, 응진전, 삼성각으로 이뤄진 영산암은 전각의 배치가 독특하고, 특히 마당이 아름다운 암자다. 출입문인 우화루 밑을 지나 돌계단 몇 개를 오르면 결코 크지 않은 마당이 도량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 마당에서 혜곡 큰스님은 세간으로 돌아가려는 기봉 스님에게 지팡이를 던지며 역정을 낸다. “말해라 말해! 마음달이 물밑에서 차오를 때 나의 주인공은 어디로 가느냐?” 큰스님이 기봉 스님에게 준 화두였다.
영화에서 영산암은 다 쓰러져가는 암자다.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지금은 법당 툇마루도, 관심당 문살도 영화 속 하고는 다르다. 쓰러져가는 암자의 모습은 절대 아니다. 영산암에는 응진전 뒤로 편안한 소나무 숲이 있다. 그 숲속 작은 언덕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영산암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작은 암자다. 바람에 날려 온 꽃씨가 바람이 정해준 곳에 자리를 잡듯 영산암은 자연 속에 자연스럽게 피어있었다. 억지로 땅을 밟지도 깍지도 않았고 길을 내지도 않았다. 영화 속에서 보았던 ‘옛날’이 있었고, ‘자연’속에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마당 위로 영화 속 장면들이 지나간다. 산새 한 마리를 죽임으로써 삶과 죽음의 문제 속에 던져진 어린 해진의 모습. 끊고 싶은 괴로운 숙명 속에서 대자유를 갈망했던 기봉 스님의 모습. 석등에 불을 켜며 저녁 마당을 거닐던 혜곡 큰스님의 모습. 영화 속에서 보았던 암자의 마당이 21년의 세월을 건너 작은 스크린처럼 눈앞에 펼쳐져있고 귓가에는 기봉 스님의 독백이 들려왔다.
“그는 홀로 왕궁을 나와 검은 숲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2500여 년 전 어느 날 이 땅에 있었던 그의 떠남은 세상을 등져버린 떠남이었던가요? 그는 출가를 통해 이 땅의 모두에게로 시간을 초월하여 돌아와 있는 것입니다. 그는 떠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돌아와 있는 것입니다. 그가 떠나간 것은 모두에게로 완전하게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달마가’는 보통의 영화와는 다르게 스토리 중심의 플롯을 버리고 회화적인 영상과 상징적인 대화를 중심으로 영화를 끌고 간다. 혜곡 큰스님의 설법과 기봉 스님의 독백이 이 영화를 보게 만드는 힘이다. 대화 속에 숨어있는 상징과 은유, 그 뒤에 따라붙는 감각적이고 불교적인 영상이 그 힘을 더 큰 힘으로 만들어 영화를 완성한다. 21년 만에 다시 본 영화가 영산암으로 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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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으로 오르는 길에는 소나무 숲길이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숲길은 경사 때문에 천천히 오를 수밖에 없어서 짧지 않은 숲길이 되어 절에 가는 맛을 더한다. 영산암은 봉정사보다 약간 높은 곳에 바로 붙어 있어서 우화루나 영산암 밖에서 봉정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보물 제55호인 봉정사 대웅전에서 부처님을 뵙고 나와 한 오십 여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영산암이다. 꽃비(雨花)가 내리는 우화루 밑을 지나면 혜곡 스님이 불을 켜던 석등이 보이고 석등을 보며 돌계단을 오르면 혜곡, 기봉, 해진 스님의 발자국이 숨어있는 영산암 마당이 나온다. 영산전에 갈 계획이 있는 불자들이 있다면 그 옛날 그 영화를 다시 한 번 보고 떠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영산암에 밤이 오고 불 켜진 응진전 문살 너머에서 동자 해진의 저녁예불 소리가 들려온다. “지심귀명례” 풍경소리 같은 해진의 예불소리가 영산암 어둠속에 번지고, 석등 앞에 선 기봉 스님은 법당을 향해 합장을 한다. 기봉 스님은 해진에게 큰스님의 유품을 전해주고 암자를 떠난다. 멀어진 기봉 스님의 뒤를 따라가며 해진이 묻는다.
“스님, 어디로 가세요?”
‘달마가’가 상영되고 그로부터 10년 뒤 영산암에서는 또 하나의 영화가 촬영되는데 2002년에 개봉한 ‘동승’이다. 월북 작가 함세덕의 원작 희곡 ‘마음의 고향’을 리메이크한 영화인데, 세 스님의 이야기라는 설정은 ‘달마가’와 비슷하다. 다음에 영산암에 올 때는 영화 ‘동승’을 다시 보고 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