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은 한 통의 서한을 받았다. 대원 장경호 거사(1899~1975)가 보낸 서한에는 한국불교 중흥을 염원해 거액을 헌납한다는 간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장 거사의 장한 뜻에 박 대통령은 재단법인을 설립해 불교 진흥에 노력할 것을 지시했다. 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민병천)은 그렇게 설립됐다.
1975년 8월 16일 재단 설립 이후 지금까지 36년 동안 진흥원은 한국불교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불교방송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을 비롯해 군포교, 불교 학술지원 등 불교계 곳곳에 진흥원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큰일을 해 온 곳이다 보니 안타깝게도 진흥원을 사이에 두고 동경과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사업에 대한 비판부터, 이사회 등 운영방식까지. 조계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계종과 진흥원의 불편한 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2008년 조계종 중앙종회가 ‘대한불교진흥원제자리찾기특별위원회’(위원장 의연, 이하 진흥원특위)를 결성하면서 부터이다.
당시 조계종 중앙종회는 “조계종 스님의 진흥원 이사회 재진출을 통해 진흥원 출범 당시의 종단과 진흥원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으로 무차회(의연ㆍ현조 스님) 무량회(진화 스님) 화엄회(각원 스님) 보림회(선문 스님) 등 종책모임 별로 위원을 선임해 진흥원특위를 꾸렸다.
이를 두고 당시 일각에서는 “주요 종책모임 별로 골고루 안배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조계종이 진흥원을 접수하기 위해 종책모임간 이해가 일치한 것”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종회에서 특위까지 꾸려진 상황에는 당시 불교방송 사장추천을 둘러싸고 진흥원과 갈등 관계에 있던 불교방송 핵심인사의 입김이 컸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진흥원특위는 “진흥원은 조계종을 보조하기 위해 구성된 사업단체”라며 “10ㆍ27법난 전까지 스님 이사가 있었던 만큼 이사회에서의 조계종 지분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흥원 설립 당시 이사회가 정부ㆍ국회대표 3인과 조계종 대표 2인으로 구성됐던 만큼, 정황상 조계종에 ‘국가에 의해 임명된 당연직 이사기관’으로서 권리가 있다는 설명이다.
조계종 측 주장의 또 다른 근거는 1975년 8월 15일 문화공보부 장관을 수신인으로 발송된 진흥원의 재단법인 설립허가서이다. 설립허가서에 첨부된 ‘재단운영 사업계획’에 조계종 총무원 운영보조가 첫 번째 사업이었다는 것.
또, 진흥원의 목적사업의 첫 번째를 ‘불교종단의 건전화를 위한 지원 사업’이라 명시해 조계종에 대한 지원의 목적이 종단 지도체제의 강화였다는 주장이다.
진흥원특위의 한 스님은 “진흥원이 정부출연기관이면서도 정부나 조계종의 견제ㆍ감시 없이 운영되고 있으며, 종신직이나 다름없는 이사의 선임마저 자의적으로 이뤄져 사유화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조계종 관계자는 “10ㆍ27법난 이후 진흥원 이사회에서 조계종이 배제되면서, 진흥원의 사유화가 가속화됐다”면서 “진흥원 설립 초기 종정 서옹 스님이 이사로 참여했을 만큼 진흥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조계종이 현재 진흥원 이사회에서 배제된 것은 법난 당시 진흥원이 계엄사 합수부인 ‘불교정화기획자문위원회’에 2500만원을 지원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흥원특위는 지난해 말 진흥원에 신군부 지원 사유 등 10개 항목의 공개질의서를 발송한데 이어, 토론회를 통해 조계종과 진흥원의 관계를 밝혀보자고 전했다.
이에 대해 진흥원 측은 구랍 28일 열린 이사회에서 토론회 불참과 공개 질의에 대한 답변 거부를 결의했다.
종단과 재단, 출ㆍ재가의 대립양상으로까지 확대 해석되던 양측의 대립에 대화의 물꼬가 터진 것은 1월 22일이다. 진흥원 민병천 이사장은 이례적으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을 예방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예방에는 진흥원특위 의연 스님과 김규칠 진흥원 상임이사도 배석해 대화의 대부분을 조계종과 진흥원의 관계, 특히 토론회에 관해 할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방 직후 자승 스님은 “진흥원 측에서 예정된 토론회가 일방적이고 일의 순서에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면서 “진흥원특위와 진흥원 양 측의 입장을 수렴해 토론회가 허심탄회한 대화의 장이 되도록 하라고 주문했다”고 전했다.
이어 스님은 “조계종이 진흥원이 서로 감정싸움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종회 특위와 진흥원이 잘 합의해 처리하고 잘못할 경우에는 (갈등해결을 위해) 직접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연 스님은 “진흥원특위와 진흥원 간에 대화가 부족했다”면서 “진흥원특위 스님들과 상의 후 필요하다면 토론회 연기 등을 결정하겠다”고 밝혀, 토론회가 무기한 연기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장경호 거사의 대원으로 설립됐으나 사유화의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진흥원과 진흥원의 제자리를 찾아주겠다며 이사 지분을 요구하고 나선 조계종, 두 기관의 화합과 소통이 불교계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만은 자명하다.
특히, 불자들은 조계종과 진흥원의 타협과는 별도로 이번 갈등을 계기로 진흥원이 장경호 거사의 원력에서 설립된 초발심을 다시 새겨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