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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남베트남 사이공. 불교를 탄압하는 남베트남 정부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유린해 오는 미국에 항의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한 승려가 있었다. 연꽃 같은 아시아의 사상이 과격하게 피어난다!”
이런 캡션과 함께 전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말콤 브라운(Malcom Browne)에 의해 촬영돼 ‘1963년 세계의 보도사진’에 선정된 이 한 장의 사진에는 격렬한 불길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스님이 있었다.
때 마침 뉴욕 슬럼가에서 주은 신문에서 우연히 본 이 장면에, 얼어붙는 충격을 받은 일본인 작가가 있었다.
그리고 2002년, 또 다시 세상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9.11테러였다. 초고층 빌딩이 불타며 푸른 하늘에서 무너져 내리는 영상을 보면서 작가의 뇌리에 다시 그 소신공양 사진이 뒤살아났다. 작가의 기존 가치관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절, 가슴 속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는 스님을 알기위해 작가는 베트남행 비행기를 탔다. 그가 기억과 현실 사이에서 애타게 희구한 것은, 힘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아시아의 숭고한 사상이었다.
베트남의 ‘영원한 심장’, ‘부처의 환생’으로 불리는 틱광득(Thich Quang Duc, 釋廣德) 스님의 소신공양 과정을 재구성해 소설화한 <분신>(토향)이 번역(김석희) 출간됐다. 2005년 제56회 일본 ‘예술선장(選獎) 문부과학대신상’, 제57회 ‘요미우리문학상’ 을 수상한 이 소설에서 일본의 중견작가 미야우치 가쓰스케(宮內勝典)는 틱광득 스님을 취재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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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의 힘’ 보여준 주인공을 찾아 베트남으로
미국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고 아프간 폭격이 시작되었다.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던 나(미야우치 가쓰스케)는 학생들과 반전(反戰)데모로 나섰다. 학생들은 진지한 눈으로 묻는다.
“뭔가 믿을 만한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합니까?”
나 역시, 믿을 만 하다고 생각했던 사상가나 작가의 이름을 하나하나 지우고 있었다. 하지만 내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있다. 그것은 간디, 그리고 베트남에서 분신자살한 X스님이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X스님의 자취를 더듬기 위해 나는 베트남을 향했다.
X스님의 이름은 틱광득. 그 이름만 들어도 눈시울을 붉히고 두 손을 모으는 베트남인들이 있는데, 그의 흔적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지운 듯 쉽게 보이지가 않는다.
X스님이 분신을 할 당시, 열렬한 가톨릭 신자인 웅오 딘 지엠 대통령과 그의 일가족이 베트남을 가톨릭교국으로 만들려고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승려들의 부당체포와 고문, 그리고 학살이 이어지며, 비폭력으로 맞서 싸우는 불교도들의 희생이 나날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 때, 틱광득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할 용의가 있습니다.”
분신 보도를 접한 응고 딘 지엠 대통령의 재수인 마담 뉴는 비웃었다.
“중의 바비큐라니 재미있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이 분신을 연출한 스님을 찾았다.
“틱광득 스님의 죽음을 개 죽음으로 만들면 안된다. 단 한 사람의 아시아인의 정신력으로 전 세계를 떨게 만드는 것이 내 역할이다.”
나는 알고 싶다. 틱광득 스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 법난 극복ㆍ불교 중흥 발원한 원력보살
저자가 취재한 틱광득 스님의 일생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틱광득 스님의 일생이 자세히 알려지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님은 1897년 베트남 중부 칸 화성 반닌현 호이 캉 마을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람 반 팟(林文發). 일곱 살 때 양친의 뜻으로 출가했다. 숙부인 호안 담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구엔 반 키엣으로 개명했다. 열다섯 살 때 사미계를, 스무 살 때 비구 및 보살계를 수계했다. 법명은 티 투이, 법호는 틱광득이다. 그후 스님은 전심을 다해 불도를 닦아 닌 호아 산중에 승방을 마련해 3년간 홀로 수행했다. 그후 그는 이 산에 천록사(天祿寺)를 창건했다. 하산한 뒤에는 시주를 받으며 홀로 베트남 각지를 편력한 후 2년만에 닌 호아의 천은사(天恩寺)로 돌아갔다.
1932년 ‘안 난 불교회’가 설립돼 하이둑사의 장로스님이 호아불교회 지부의 도사(導師)로 초빙했다. 거기서 활동하는 동안 스님은 14 곳의 절을 건립하거나 복원했다.
1943년 베트남 중부에서 남부로 내려가 사이공, 자딘, 타이닝, 바리아, 하티엔, 카이라이 등지에서 포교하며 캄보디아에 당도했다. 3년동안 프놈펜에 머물며 베트남 불교도를 교화하면서 팔리어 경전이나 테라와다(상좌부)불교를 배웠다. 이후 베트남 남부로 돌아와 사이공시 3구의 롱빈사에 주석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롱빈 스님’이라고 불렀다.
1953년 남월불교회 부이사장과 의례위원장 직에 초빙된 그는 남월불교회 최초의 본부가 있던 포크호와사 주지에도 임명됐다.
1958년 남월불교회 본부가 싸러이사로 이전한 것을 계기로 그는 직책을 사임하고 각지를 돌며 포교에 나섰다. 그는 일생동안 31개의 사원을 건립하거나 복원했다. 마지막에 주지를 맡은 사원은 후뉴앙구 구엔 훼 거리 68번지에 위치한 관세음사이다. 그 길은 뒷날 ‘틱광득 거리’로 개명됐다.
1963년 스님은 65세의 노령에도 불교도들의 투쟁에 적극 참여했고 단식을 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톨릭 정부의 탄압은 더욱 과격해지고 훼에서는 가슴 아픈 학살이 일어났다. 같은 해 5월 27일 통일불교회에 ‘소신공양 청원서’를 제출한 스님은 6월 11일, 스스로의 몸을 불살라 공양하겠다는 심원(心願)을 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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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에게 종교평등 정책 실행 호소
소신공양 일주일 전에 쓴 ‘심혈의 결심’이란 유서에서 스님은 “우리나라 불교가 고난의 때임을 보고 여래의 장자(長子)로 명명되는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 나는 불교가 멸망해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이 한 몸 불살라 제불(諸佛)에 공양하고, 그리하여 불교를 지키는 공덕을 행할 수 있기를 기꺼이 청한다”고 밝혔다. 부처님의 크신 은혜로 베트남의 승려와 불교도들이 테러, 구속, 감금으로부터 벗어나고,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안락할 것을 기도한 스님은 가톨릭 신자인 응오 딘 지엠 대통령에게 종교평등정책을 실행해 줄 것을 요청하는 호소문을 함께 발원문에 남기기도 했다.
“눈을 감고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감히 응오 딘 지엠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박애와 자비의 마음으로 국민을 위해 종교평등의 정책을 실행하고, 그리하여 영구적으로 나라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한국어판 소설 제목을 <소신(燒身)>으로 하지 않고 <분신(焚身)>으로 정한 저자는 틱광득 스님을 ‘부처의 환생’이라고 결론 짓고, <법화경> ‘약왕보살품’에 묘사된 소신공양(burning service)의 공덕을 인용하는 글로 중생의 고통을 대신해 열반한 현대판 보살의 원력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암흑을 깨는 횃불처럼 올바른 가르침의 백련(白蓮)은 모든 괴로움과 병, 윤회, 속박의 좁은 길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그리고 모든 사람은 생사의 대해를 건널 것이다.”
현재 일본의 중앙일간지에 무저항주의의 상징인 간디의 일대기를 소설로 연재 중인 저자는1년간의 연재가 끝나는 5월경,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불자와 문인들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분신|미야우치 가쓰스케 저, 김석희 역|토향|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