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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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ㆍ자매 한마음으로 한 차 타고 사찰 참배
진주 대선직물 남정갑 불자 가족





신년특집_주변 사람과 하나 되는 길

어느 날, 조계종립 특별선원 문경 봉암사에 회색 승합차 한 대가 들어섰다. 대중공양 온 보살이려니 했는데 조금 달랐다. 차에서는 보살도 내리고 거사ㆍ아이도 내렸다. 10명이 넘는 인원이 저마다 얼굴에는 환한 미소를 띄우며 쏟아져 내리는 듯 하차했다.

부처님오신날 등 법회 때마다, 동안거ㆍ하안거 철마다 그들은 전국 사찰을 누볐다. 그 승합차를 비롯해 일행의 차가 서는 곳이면 어김없이 똑같은 사람들이 내렸다. 진주 남정갑(대선직물 대표이사) 불자 가족이다.

절에 다니는 불자 중 대부분은 혼자거나, 두어 명이 일행이다. 그 수가 많더라도 친구, 동창 등 남남으로 모인 사이가 대부분이다. 가족이 함께 절을 찾는다 해도 대여섯명 규모의 직계가족 뿐인 경우가 많다. 이렇다보니 10명 넘는 인원이 꼭 함께 절을 찾는 남 대표 가족의 사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실크 생산의 5대산지인 진주 시내에 위치한 남정갑 대표의 자택을 찾았다. 길에서 보인 간판은 대선직물. 실크 가공산업 특성상 가내수공업으로 시작한 경우가 많다보니 대선직물이 곧 남 대표의 집이었다.

이날 남 대표의 집에는 대표의 부인이자 5남매 중 셋째 이귀연 보살(선행화ㆍ51)을 비롯해 맏이인 이정자 보살(문수화ㆍ68)과 막내 이현숙 보살(45ㆍ합천가족사랑상담소장) 등 5남매 중 세 자매와 남 대표의 장녀인 남승희(26)씨, 이정자 보살의 손녀 황서영(9) 어린이가 자리했다. 다른 가족들은 바쁜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했지만, 다들 절을 찾을 때면 열일을 제치고 하나가 된다. 비단 5남매 가족뿐만 아니라 남 대표의 동생 남정근 거사(52) 가족까지 모두 모인다.

가족의 불연(佛緣)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젊은 시절 우울증 등 신경성 질환에 시달리던 이정자 보살은 동네 할머니들을 따라 진주 호국사에 올랐다. 마실 물을 뜨러 새벽마다 호국사를 찾던 일행을 쫓아 이 보살도 열심히 절에 다녔다. 그때 새벽 3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절간 문을 열던 어린 스님이 한 분 있었다. 영진 스님(現 봉암사 한주)이었다.

하지만 스님의 얼굴만 익혔을 뿐 보살은 스님과는 말 한마디 나누질 못했다. 몇 해가 지났다. 당시에는 노보살들이 스님을 찾아가 절에서 환갑잔치를 열었다. 어느 노보살의 환갑잔치를 따라 산청 율곡사를 찾았는데 그곳에 영진 스님이 있었다. 보살은 스님을 알아봤지만, 스님은 보살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또 몇 해가 지났다. 해인사를 찾았던 보살은 법당에서 염불하던 영진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진주 호국사 신도였냐”며 “안면이 있다”고만 말했다. 그러고만 말고 헤어진 스님을 다시 만난 것은 1995년 설악산 봉정암. 영진 스님과의 인연은 그것이 마지막인 듯 했다.

1989년, 남정갑 대표가 사천서 가내공업 형태로 사업을 힘겹게 꾸려갈 때였다. 그때 지금은 작고한 오빠가 이귀연 보살에게 “화투 치던 사람도 팔공산에 오르고 나면 끗발이 오른다”며 팔공산 갓바위에 가볼 것을 권했다. 그 오라버니가 운명했을 때 시달림 온 스님이 있었다. 지금은 부산에 있는 송암 스님이었다. 순간 남 대표 가족은 맑아 보이는 스님이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토굴이라도 지어드리고 싶었다. 사업이 어려워 형편도 안됐지만 온식구가 나서 지리산 일대를 누비며 스님에게 시주할 절 지을 터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인연터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남 대표 가족이 지리산을 누비는 동안 다른 인연이 생겼던지 그 스님은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던 때, 남 대표 부부는 산책삼아 진주 월아산을 찾았다가 천곡사 뒤 성운암에 이르렀다. 그곳 스님의 “봉정암은 다녀온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부부는 불현 듯 영진 스님이 생각나 되물었다. 영진 스님과 도반이었던 성운암 스님은 “영진 스님이 지리산 자락 토굴에서 수행 중”이라며 알려줬다. 너무나 반가웠다. 부부는 다시 남원 실상사 등에서 묻고 물어 스님을 찾았다. 반가운 마음에 자매 형제 할 것 없이 온가족이 함께 영진 스님을 만났다. 2002년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남 대표 가족은 스님과 절을 찾을 때면 언제나 함께 다녔다. 승합차를 타고, 자리가 모자라면 승용차를 더했다.



스님을 다시 만난 후 가족은 어렴풋이 오가며 배웠던 불교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막연했던 부처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알아갈수록 집안일도 잘 풀렸다.

남 대표의 사업장은 4년 전 사천에서 진주로 확장 이전해 이제는 한복지ㆍ넥타이ㆍ인테리어 원단 등을 두루 취급하게 됐다. 딸도 이화여대에 진학해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남 대표는 “IMF금융위기를 비롯해 최근의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불경기로 다른 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해도 우리 사업장은 오히려 식사할 시간도 없이 바빴다. 최근에는 진주 문산단지에 1200평을 분양받아 사업확장을 준비 중”이라 말했다.

현재 대선직물의 직원 수는 40여 명이다. 남 대표는 문산단지에 새 공장을 짓고, 인터넷을 통해 판로도 다양하게 개척할 예정이다.

이귀연 보살은 “영진 스님이 많은 사람 먹여 살리고 베풀고 살라며 내게 ‘선행화’라는 법명을 지어 줬다”면서 “공장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면서 직원도 내식구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부창부수라 했던가. 남 대표도 “나와 내 가족 먹고 살려면 위험을 감수하며 사업을 확장할 필요는 없다. 여럿이 함께 잘 살기 위해 함께 노력하며 사는 것 아니겠냐”고 거들었다. 남 대표는 직원과 함께 나누는 경영을 실천하기 위해 간부를 중심으로 직원들을 사업별로 분사시키는 방안 등도 추진 중이다.

이어 남 대표는 “지금까지 몸으로 해오던 것을 제대로 해보려고 동생도 같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면서 “숭실대 섬유학과에 재학하다 군복무중인 아들을 전문경영인으로 키워 대를 이은 가업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남 대표를 비롯해 이귀연 보살 자매는 모두 <법화경> 사경을 하고 있다. 이귀연 보살은 진주 연화사 등에서 활발한 신행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진주 관음암 신도회장까지 맡았다.

“가정과 사업이 안정되면 단기출가 등을 통해 불교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습니다.” 이 보살은 108순례단에도 동참 중이다. 이 보살은 “사찰 방문시 마다 받는 염주로 108염주를 만들어 가보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언니인 이정자 보살은 “그저 마음이 편하고 싶어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를 뿐이다. 하지만 불교를 알면 알수록 ‘내 눈에 안보이는 것부터 좋아진다’는 옛날 노보살 이야기를 새록새록 체험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천의 작은 공장에서 시작해 진주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실크 전제품을 취급하는 대선직물 남정갑 대표의 성공 뒤에는 형제ㆍ자매 등 온가족이 한마음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른 신심과 원력이 있었다.
글=조동섭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cetana@gmail.com
2010-01-04 오후 3: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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